[국제 질서의 비용] 흔들리는 ‘美 안보 약속’, 유럽의 독자 생존 위한 방위 체계 재편
[국제 질서의 비용] 흔들리는 ‘美 안보 약속’, 유럽의 독자 생존 위한 방위 체계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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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비 급증, 유럽 안보 패러다임 전환 가속 미국 전략 축 이동에 자립형 방위 체계 요구 통합 억지력·전략적 자율성 구축 과제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유럽의 국방 전선에 전례 없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2024년 국방 예산으로 3,430억 유로(약 587조원)를 배정했고, 2025년에는 이를 3,810억 유로(약 652조원)로 확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5년 만에 지출 규모가 3분의 2 가까이 늘었다. 이는 단순한 예산 증액을 넘어 유럽 안보 정책의 구조적 전환을 보여주는 신호다. 유럽 대륙 동부에서 지속되는 전쟁에 대한 대응 차원을 포함하는 동시에, 미국에 의존해 온 기존 안보 구조를 재정비하려는 흐름을 보여준다.
유럽 방위 책임의 재정립
지난 4년간 유럽 각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과 군수품 조달에 막대한 재정을 집행해 왔다. 국방비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고, 연간 조달 규모도 전년 대비 42% 증가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예산의 팽창이 곧 전략적 완성도를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방위비 지출 규모와 억지력의 실효성은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다. 유럽이 단순한 무기 구매자나 장비 공급 거점에 머물지 않으려면 국방 책임의 범위와 내용부터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문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그동안 유럽의 안보 논의는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 체제가 궁극적인 안보 기반이라는 전제 아래 전개돼 왔다. 미국이 전략을 설계하면 유럽은 재정과 전력으로 이를 보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점차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다수의 유럽 국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제시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2% 방위비 지출 목표를 충족하거나 이에 근접했지만, 그 자체가 곧 실질적 전투력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체계다. 통합된 억지력은 각국의 예산을 단순히 합산한다고 형성되지 않는다. 상이한 무기 체계를 상호 운용 가능하도록 정비하고, 군수 지원을 표준화하며, 유사시 즉각 가동할 수 있는 통합 지휘 구조를 구축할 때 비로소 실효성을 갖는다.

자생적 억지력 확보 사활
유럽이 이처럼 빠르게 안보 기조를 재정립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전략적 무게중심 이동이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현재 인도·태평양 지역을 최우선 전략 지역으로 규정하고 전력 배치를 재조정하고 있다. 이는 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자동적이고 광범위한 지원을 당연시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드러낸다. 올해 미 국가국방전략(NDS)의 방향성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동맹국에 대한 비용 분담과 역할 확대 요구가 한층 구체화되고 있으며, 미국의 개입은 조건과 상호성에 기반해 조정되는 흐름을 보인다. 유럽으로서는 안보 구상을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기 어려운 환경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유럽 방위책임은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제로 자리 잡았다. 미국 정치의 변화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방위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고가 장비를 대량 도입하는 방식만으로 안보 역량이 확보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는 이유다.
억지력의 신뢰성은 무기 체계의 수적 확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전략의 일관성, 안정된 군수 기반, 국민의 민방위 준비 수준이 결합될 때 실질적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전쟁 초기 단계에서 상대의 공세를 차단하려면 방공망과 대드론 체계, 정밀 타격 역량 등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핵심 전력에 자원을 우선 배분하는 전략적 선택이 요구된다.

제도적 통합과 산업 생태계 구축
전략적 전환을 실질적 변화로 이어가려면 구체적인 제도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유럽 국가들이 공동 조달을 확대하고, 정비 계약을 통합하며, 탄약과 핵심 부품을 공동 비축하는 체계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EU와 NATO가 마련한 제도적 틀을 실제 운용 단계로 확장할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산업 정책도 재정비가 불가피하다. 각국의 산업 이해를 앞세우는 방식으로는 중복 투자와 비효율을 피하기 어렵다. 상호 운용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고 다국적 플랫폼과 표준화된 절차를 채택해야 전력 통합의 효과를 높이고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안보의 범주는 군사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위기 상황에서도 사회의 핵심 기능이 유지되도록 민간 시스템을 정비하고, 교육 과정에 비상 대응과 정보 대응 역량을 포함하는 등 구조 전반의 보강이 병행돼야 한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민수 기술과 방위 기술을 연결하는 혁신 거점으로 기능 범위를 넓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지방정부 역시 도로·철도·에너지·통신 등 기반 시설을 군사 기동성과 연계해 점검·보완에 나서야 할 상황이다. 이는 평시 대비 체계를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유럽의 목표는 미국의 군사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의 핵 억지 체제가 유지되는 현실을 전제로 하되, 재래식 전력과 신속 증원 능력, 보안이 강화된 통신망 등 핵심 분야에서 자립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향이다. 확대된 국방 예산이 일회성 장비 도입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뒷받침하는 구조로 이어지려면 실행력을 높여야 한다. 예산과 제도, 산업 역량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정책 집행이 뒤따를 때 국방비 증액은 비로소 실질적 안보 역량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s new burden: why European defence responsibility can no longer wait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