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국제 질서의 비용]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국민적 신뢰’ 없이는 사상누각

[국제 질서의 비용]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국민적 신뢰’ 없이는 사상누각

Picture

Member for

1 year 7 months
Real name
김동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거칠기 마련입니다. 파편화된 정보를 정리해 사회 현장을 부드럽고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정

종전 압박 고조 속 협상 성패 좌우하는 우크라이나 민심
안보 보장 없는 영토 양보 거부, 정치적 정당성이 합의의 관건
부패 책임·투명성 확보 없으면 평화 합의도 내부 균열 위험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으로 이어지면서 종전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협상의 성패를 좌우할 결정적 요인은 우크라이나 국내 여론이다.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키이우인디펜던트(KI)가 보도한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74%는 신뢰할 수 있는 안보 보장 없이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주) 철수와 군 병력 축소를 요구하는 평화안에 반대했다.

이는 전쟁 종식을 바라는 요구와는 별개로, 영토 상실과 방위력 약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고히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지속 가능한 합의는 지도부와 국가 시스템, 전쟁에 지친 시민 사이의 정치적 합의가 중대한 양보를 정당성 훼손 없이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다. 만약 내부의 정당성 기반이 흔들릴 경우, 어떤 외교적 합의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정치 안정의 구조와 균형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안정은 국내총생산(GDP)이나 대통령 지지율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안정의 토대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 국가 시스템의 작동 능력, 시민의 조건부 동의가 맞물린 구조에 있다. 지난 4년간 전시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 균형은 유지돼 왔다. 군과 방위 기관은 높은 국민적 신뢰를 확보한 반면, 민간 행정 영역에 대한 평가는 사안별로 엇갈렸다. 특히 정치 지도자에 대한 신뢰도는 침공 직후 급등했다가 각종 논란을 거치며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국가 운영은 중단되지 않았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체제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우크라이나의 제도적 회복력을 방증한다.

폴란드 매체 뉴이스턴유럽(New Eastern Europe)은 우크라이나의 회복력이 애국적 정당성과 사회적 결속, 시민사회와 자원봉사 조직의 역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전시 체제의 공백을 메우며 국가 운영을 지탱하는 실질적 토대가 된 셈이다. 하지만 대통령 측근이 연루된 부패 의혹은 전투 손실과는 차원이 다른 파장을 낳는다. 이는 단순한 행정 실패를 넘어 국민 신뢰를 직접 훼손하는 사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전시 지도자이자 반부패 개혁의 상징으로 평가받아 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측근 스캔들은 곧 정치적 정당성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주: 우크라이나 여론은 단순 휴전에는 과반이 동의하지만, 공식적인 영토 양보가 포함되면 지지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과 경제적 제약이 설정한 협상의 마지노선

이 같은 내부 구조는 향후 협상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기존 안보 협상이 영토 범위와 이행 조건을 조율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면, 실제 합의의 성패는 사회적 신뢰와 규범이 유지되느냐에 달려 있다. 우크라이나 온라인 매체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Ukrainska Pravda) 보도에 따르면 응답자의 82%는 어떤 상황에서도 러시아에 맞서야 한다고 답했다. 또한 52~75%는 대규모 영토 양보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휴전은 강력한 안보 보장과 러시아의 정치적 압박을 차단할 제도적 장치가 확보될 때에만 검토 가능한 선택지로 인식된다.

경제 여건도 협상의 폭을 제약한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급격한 역성장 이후 2023년 성장세로 전환됐지만, 2025년까지 성장률은 1.8~3.0%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은행(World Bank)이 추산한 향후 10년간 재건 비용은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다. 특히 전력 인프라의 취약성은 일상생활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평화의 대가로 제시되는 약속은 구체성과 이행 가능성을 갖추지 않으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불확실한 장래 성장 전망만으로는 현재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에 부족하다.

부패 문제 역시 협상의 정당성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다. 앞서 반부패 감시 프로젝트 미다스 리뷰(Midas Review)는 국영 전력 조달 과정에 1억 달러(약 1,46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관여한 에너지 인프라 공기업의 계약·조달 비리 의혹으로 수사가 확대됐고, 고위급 인사들의 사임과 구금이 이어졌다. 외부 침략에는 결속을 보이던 시민들도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내부 부패에는 강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협상에 대한 태도에도 반영된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Le Monde)에 따르면 강력한 안보 보장을 전제로 협상에 열려 있다는 응답은 1년 전 33%에서 2024년 5월 57%로 상승했다. 그러나 여론의 변화가 곧 지도부의 정치적 부담 완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패에 연루된 권력층에 대한 엄정한 책임 규명 없이 영토 양보가 이뤄질 경우, 시민의 불만은 외부가 아닌 내부 권력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투명한 책임 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합의는 거리 시위와 정당성 위기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주: 우크라이나 경제는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성장세는 여전히 약하다. 성급한 평화 협정이 기대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제도적 과제

일각에서는 전쟁이 종식되기만 하면 안보라는 현실적 이익이 다른 가치보다 앞설 것이라는 낙관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여론은 자유를 지키는 조건 아래의 ‘합의’와 충분한 보장 없이 이뤄지는 ‘양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안보가 확보되지 않은 타협은 평화가 아니라 후퇴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치권은 외부의 안보 약속과 내부 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다국적 신속 대응 체계 구축, 법적 구속력을 갖춘 안전 보장 장치 마련, 독립적 검증 시스템 도입이 병행되지 않으면 합의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재건 자금 집행은 투명한 조달 절차와 시민 참여형 감독 체계가 함께 작동할 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행정부는 전력 복구와 겨울철 안전 지원 등 생활 밀착 예산의 집행 현황을 상시 공개해 정책의 실효성을 보여줘야 한다. 고통의 조기 종식을 앞세워 민주적 절차를 생략하는 결정은 단기적으로 속도를 낼 수 있으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합의는 장기적 안정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적 안정은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 협상을 성립시키는 조건이다. 전쟁 종식에 대한 요구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국민의 신뢰와 제도적 정당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합의는 내부 균열을 확대할 수 있다. 향후 평화 논의는 단순히 영토 문제를 조정하는 기술적 협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패에 대한 책임 규명과 실효적 안보 설계를 함께 포함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의와 안전의 기반 위에서만 지속 가능한 평화가 가능하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fragile anchor: why Ukraine political stability — not just economics — will decide any peace deal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

Picture

Member for

1 year 7 months
Real name
김동현
Position
기자
Bio
[email protected]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거칠기 마련입니다. 파편화된 정보를 정리해 사회 현장을 부드럽고도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