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구형 반도체 장악한 중국, 첨단만 쫓다 바닥 내준 한국의 역설
[중국 반도체] 구형 반도체 장악한 중국, 첨단만 쫓다 바닥 내준 한국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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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삼성전자, 첨단 공정 주력 위해 8인치 라인 축소 中 파운드리, 물량·가격 결정권 확보하며 '주도권' 확대 AI 칩 경쟁에 구형 반도체 시장 잃은 韓 반도체 위기론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선두 기업들이 첨단 공정에 역량을 집중하며 8인치(200㎜) 등 레거시(구형) 생산라인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사이, 중국이 이 공백을 빠르게 파고들며 물량과 가격 결정권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이에 구형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도 중국으로 이동하는 모양새다. 업계에서는 글로벌 1위 TSMC를 추격해야 하는 입장에서 인공지능(AI) 칩 중심의 첨단 공정에 집중한 전략이 오히려 구형 반도체 시장을 중국에 내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8인치 공정 수요 급증, 가격 5~20% 인상
1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TSMC는 내년부터 6인치(150㎜), 8인치 공정 생산 라인을 폐쇄할 것이라고 고객들에게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역시 8인치로 가동되는 일부 생산 라인을 단계적으로 축소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TSMC와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생산라인을 점진적으로 감축하기로 결정하면서, 올해 전 세계 8인치 웨이퍼 생산량이 전년 대비 약 2.4%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같은 결정은 수익성이 높은 첨단 공정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TSMC는 지난 15일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AI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시설투자에 520억~560억 달러(약 76조~82조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시장 예상치를 20% 이상 웃돈 규모다. 2029년까지의 매출 증가율도 연평균 20%에서 25%로 높여 잡았다. 삼성전자도 3나노미터(㎚) 이하 글로벌 빅테크 수주가 본격화되며 해당 공정에 주력하고 있다.
8인치 공정은 주력 공정인 12인치(300㎜)보다 웨이퍼 한 장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수는 적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에 유리해 중견·중소 파운드리 업체들이 주력하고 있다. 생활가전이나 자동차, 데이터센터 등에 들어가는 전력반도체 등이 8인치 공정을 통해 주로 생산된다. 최근 AI 산업의 성장세와 함께 기기당 반도체 탑재량이 늘고, 전력 제어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생산업체의 가동률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파운드리업계 1·2위인 TSMC와 삼성전자의 공급량이 감소하면서, 시장에서는 올해 8인치를 비롯한 구형 공정 가격이 5~20%가량 인상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트렌드포스는 "최근 다수의 파운드리 업체들이 구형 공정 가격 인상을 검토 중"이라며 "다만 최종 수요 시장의 불확실성과 메모리 및 첨단 공정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 압박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인상 폭은 제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中, 구형 반도체 공급망 장악하며 '무기화'
이러한 흐름을 두고 업계에서는 8인치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상당수 중국 업체가 반사이익을 볼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SMIC와 화홍반도체, CR마이크로 등이 해당 공정을 제공하고 있다. 이미 SMIC는 몰려드는 주문에 대응해 8인치 공정 가격을 10% 안팎으로 인상했고, 화홍반도체는 차량용 반도체 선두기업인 인피니언과 온세미 등의 제조 수요가 집중되면서 일부 8인치 생산 라인 가동률이 100%에 육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구형 반도체 생산 역량 확대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미·중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로 네덜란드 장비기업인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이 차단되면서 7나노 이하 최첨단 공정 진입이 사실상 봉쇄됐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전략을 수정해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28나노 이상의 성숙 공정에 집중 투입하고 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전 세계 구형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7년 4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8나노 공정의 경우 2028년 시장 점유율이 32%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구형 반도체 전략이 단순한 시장 점유율 경쟁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자체를 흔드는 구조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는 최근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구형 반도체 시장은 과거 희토류 분쟁보다 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전 세계가 AI와 3나노 이하 첨단 공정 경쟁에 몰두하는 사이 중국이 자동차와 가전, 산업기기의 핵심 부품인 구형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며 이를 사실상 무기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로 드러난 바 있다. 넥스페리아(Nexperia) 사태가 대표적이다.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뒀지만, 중국 윙텍(Wingtech)이 소유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네덜란드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경영권 개입을 시도하자 중국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넥스페리아 전체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는 중국 내 공장에서 생산되는 특정 반도체의 수출을 통제한 것이다. 이 조치로 폭스바겐을 비롯한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했다.
DB하이텍 선전하지만 시장 지배력엔 한계
국내 반도체업계에서는 8인치 웨이퍼를 주력으로 하는 DB하이텍이 대형 파운드리의 공급 축소에 따른 단기적인 수혜를 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8인치 물량이 중견 업체로 이동하면서 DB하이텍의 공장 가동률과 가격 협상력도 함께 개선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전력반도체 수요 증가에 힘입어 실적도 개선세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성과가 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DB하이텍이 8인치 공정에서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확보하고는 있지만, 대규모 증설이나 시장 지배력 확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DB하이텍의 선전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안정 신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가장 큰 문제는 첨단 공정에서 글로벌 1위와의 격차를 따라잡지 못한 상황에서 구형 공정마저 일부 기업의 경쟁력에 의존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의 구형 반도체 물량 공세가 가격 결정권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비용 구조와 수익성이 동시에 압박받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 파운드리 산업이 선택과 집중에 실패할 경우 어느 영역에서도 확실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러한 여파는 한국 AI 반도체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컨트롤러, AI 가속기, 온디바이스 AI용 시스템온칩(SoC) 등에서 중국 업체들이 저가 부품을 묶어 공급하면서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들은 가격 경쟁력과 조달 안정성 모두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의 경우 고성능 연산 칩 자체보다 이를 안정적으로 구동하는 주변 칩 조합이 완성도를 좌우하는데, 이 영역이 중국산 초저가 제품으로 채워질 경우 국산 칩 기반의 완제품 전략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