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저가 버스에 밀린 기아, 유럽도 제조 기반 잠식 경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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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공세에 밀린 국내 버스 제조 산업 산업보호 기류로 맞서는 유럽 업계 국가안보 의제로 비화한 중국산 전기버스

중국산 전기버스가 국내 시장을 잠식하면서 기아가 30년 넘게 생산해 온 대형버스가 퇴장 수순에 들어갔다. 유럽에서도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를 둘러싼 산업 보호론과 안보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전동화 전환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유럽의 상용차 제조 기반이 동시에 압박받는 양상이다.
기아, 그랜버드 생산 중단 계획 공식화
17일 기아 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사측은 이날 열린 노사 고용안정위원회 실무협의 2차 회의에서 대형 버스인 ‘그랜버드’ 생산 중단 입장을 노조 측에 전달했다. 생산 중단 시점은 주문 물량이 소진되는 1~2년 뒤다. 기아는 전신인 아시아자동차 시절부터 버스를 생산해 왔다. 그랜버드는 기아가 생산하는 유일한 버스 차종으로 1994년 디젤 기반으로 출시돼 인기를 끌었다. 다만 최근 철도 중심 교통 시스템 정착과 버스 관광·출퇴근 문화가 사라지면서 수년째 연간 판매량이 1,300~1,400대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그랜버드 생산량도 1,403대에 불과했다.
특히 최근 국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산 저가 전기버스의 공세에 입지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기차 업체인 BYD의 전기버스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기반으로 국내 대형버스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중국산 전기버스는 우리 정부의 보조금을 등에 업고 2023년 점유율이 50%를 돌파했다. 이를 두고 이재명 대통령은 “중국 제품에 보조금을 다 줘 중국 업체들만 배 불리고 국내 전기버스 업체는 죽어버렸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중국 버스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내버스와 고속·관광 버스 중심의 그랜버드는 공략 시장이 다르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 역시 최근 고속·관광 버스로 제품군을 넓히고 있다. 이들은 자체 보조금 등을 통해 대당 2억원 수준인 기아의 그랜버드보다 수천만~1억원 정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 기아 입장에선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전동화와 동시에 가격 인하에 나서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랜버드 생산 중단 방침에 노조는 즉각 반발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기아자동차지부 광주지회는 이날 긴급 성명서를 통해 "사측이 생산중단 이후의 생산 운영 계획, 미래 투자 계획, 고용안정 대책 등 조합원들의 미래와 생존권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고용대책 없는 버스 생산 중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중장기 운영계획을 책임 있게 제시하기 전까지 어떠한 협의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 업계, 中 전기버스에 대한 보조금 조사 촉구
중국산 전기버스 공세에 따른 산업 기반 압박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 산업 강국이 밀집한 유럽도 중국산 전기버스 공세에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유럽 전기버스 업계는 지난 2024년 EU 집행위원회에 중국산 전기버스를 대상으로 한 보조금 조사 착수를 요구했다. 중국 업체들이 정부 지원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유럽 공공조달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중국산 전기버스는 유럽 전기버스 시장의 3분의 1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유럽 내 입지를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덜란드 금융기업 라보뱅크 보고서에 따르면 BYD와 위퉁 등 중국 업체들의 유럽 전기버스 시장 점유율은 2017년 13%에서 2023년 24%로 늘었다. 유럽 버스 제조사들은 현행 조달 체계가 지속될 경우 역내 생산기반과 고용이 위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도 중국산 전기버스 확산에 대한 견제 수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공공조달 과정에서 차량 가격 중심 평가 방식에서 벗어나 탄소배출과 생산공정, 공급망 등을 함께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도 정비에 나섰다. 중국 업체들이 저가 공세를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자, 가격 경쟁력만으로 입찰 결과가 결정되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진 것이다. 알스톰, 이베코버스 등 현지 제조업체들도 중국 업체의 보조금 기반 수주 경쟁이 지속될 경우 유럽 상용차 산업 전반의 투자 여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독일철도(DB) 산하 교통 자회사 DB레기오가 지난해 말 대규모 전기버스 입찰에서 BYD와 중국 중퉁버스 등을 공급사로 선정하자, 철도·교통노조와 정치권 일각은 자국 제조 기반 훼손을 문제 삼았다. 자동차 산업을 국가 경쟁력의 축으로 삼아 온 독일에서조차 가격과 납기 경쟁력 앞에 중국산 버스 도입이 현실화하면서 공공조달에 산업 보호 원칙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독일 정계에서는 유럽산 제품이 경쟁 가능한 조건을 갖췄을 때 자국·역내 업체를 우선해야 한다는 ‘산업 애국주의’ 논리까지 제기됐다. 라르스 클링바일 재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도시들에서는 메르세데스-벤츠와 만의 훌륭한 전기버스가 오랫동안 운행되고 있다"며 "산업 입지에 대한 건강한 애국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중국산 전기버스 보안 위험 공개
중국산 전기버스를 둘러싼 논란은 보안 영역으로도 번졌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대중교통 운영사 루터는 지난해 여름 실험을 통해 중국 업체 위퉁(Yutong)의 전기버스에 백도어(비밀 접근통로)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부 디지털 신호가 차단되는 산악 터널 내 시설에서 중국산 전기버스와 네덜란드산 전기버스를 운행했지만, 위퉁의 버스에서만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기능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루터 측에 따르면 중국 제조사는 루마니아 심(SIM)카드를 통해 원격으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배터리 및 전원 공급 제어 시스템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 원격 제어를 통해 정보 탈취나 갑작스러운 운행 중단 등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르웨이에선 전국적으로 약 1,300대의 전기버스가 운행 중인데, 이 중 약 850대가 위퉁 전기버스다.
비슷한 시기 덴마크 최대 운수회사인 모비아도 관계 당국으로부터 위퉁 전기버스가 원격으로 제어당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영국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덴마크 민방위·비상관리청은 모비아 측에 “전기버스에 인터넷 연결 시스템과 카메라, 마이크, 위성항법시스템(GPS) 등의 센서가 설치돼 버스 운행에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취약점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비아는 총 469대의 중국산 전기버스를 운행 중이며 이 중 262대가 위퉁이 제작한 버스다.
유럽 각국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노르웨이는 차량 전송 신호 지연과 방화벽 개발 등으로 취약점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덴마크와 영국도 중국산 자동차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유럽 각국은 이 사안을 단순한 차량 보안 문제가 아닌 교통 인프라 리스크로 인식하고 있다. 전기버스는 배터리와 통신장비, 소프트웨어, 위치정보 시스템이 결합된 이동형 네트워크로 기능한다. 차량 원격 제어 가능성이 현실적 우려로 부상하면서 보안 검증 범위도 차량 자체에서 운영 시스템과 충전 인프라까지 확대되는 추세다. 특히 유럽은 5G 장비 공급에 대한 화웨이·ZTE 배제 조치에 이어 전기버스·충전운영 시스템까지 안보 평가 범위를 확장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어 이번 이슈가 유럽 대중교통망의 국산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