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죽음의 사이클’ 없다? 다시 떠오른 ‘신경제’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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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중심 재편으로 달라진 메모리 산업 지형 공급 과잉 위험과 수요 편중 구조의 동시 확대 신경제 담론과 닮은 AI 슈퍼사이클 논쟁

극심한 호황과 불황의 반복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짓눌러온 ‘죽음의 사이클’이 막을 내리고 있다는 진단이 제기됐다. 메모리 반도체가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필두로 대체 불가 부품으로 진화하면서 불황 때도 급격한 충격 대신 완만한 연착륙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 혁신이 경기순환의 법칙까지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과거에도 있었다. 인터넷 혁명기 미국을 휩쓸었던 ‘신경제(New Economy)’ 열풍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시장은 기술 발전이 경기순환을 약화시킬 것으로 확신했지만, 결국 닷컴 버블 붕괴와 함께 낙관론도 막을 내렸다.
UBS “2029년 완만한 다운사이클 예상, 급락 아닌 연착륙”
16일(현지시간)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HBM을 포함한 글로벌 D램 매출은 전 분기 대비 80% 증가한 970억 달러(약 133조원)로 집계됐다. 1,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사상 최고치로, 지난해 동기 대비 260% 급증했다. 삼성전자가 38%의 시장 점유율로 선두를 지켰고, SK하이닉스(29%)와 미국 마이크론(22%)이 뒤를 이었다.
세 기업은 이미 과거 수차례의 불황 사이클을 겪어온 생존자들이다. 2020년 이후 3사는 D램, 낸드플래시 시장에 공급 과잉 신호가 보일 경우 적극적인 감산이나 생산량 조절, 공정 전환 등을 통해 암묵적으로 일정 수준의 공급가를 통제하고 있다. 설비투자 방식도 달라졌다. 3사 모두 신규 공장을 짓는 대신 기존 팹에서 범용 D램을 HBM으로, 더블데이터레이트(DDR)를 DDR5로 전환하는 등 보수적인 생산능력 확장을 진행 중이다. 신규 팹은 착공 후 2~3년이면 물량 폭탄이 되지만, 공정 전환은 공급량 증가가 제한적인 반면 생산성은 높아진다.
특히 AI 인프라에 핵심적인 HBM의 등장이 메모리 시장의 기초 체력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전체 D램 생산량의 30~40% 수준을 HBM에 할당하고 있다. 이에 PC, 모바일, 서버에 사용되는 범용 D램 공급이 줄면서 지속적인 가격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AI 데이터센터 수요와 보수적인 설비투자를 근거로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27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관측했다.
호황이 기존 예상보다 더 길게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은행(IB) UBS는 최근 리포트를 통해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인해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2028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존에는 내년 말까지 공급 부족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봤는데 6개월가량 늦춘 것이다. 이어 UBS는 “2029년에 완만한 다운사이클이 올 것”이라며, 과거와 같은 급격한 추락이 아닌 장기 호황 속 연착륙을 예상했다.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의 HBM 물량이 장기 계약을 통해 향후 3년 치가 모두 완판됐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수요 예측 실패에 따른 가격 폭락 등이 발생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분석이다.
과도한 빅테크 의존·중국 추격 등 하강 위험 산적
하지만 반도체 호황을 낙관하기에는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먼저 빅테크에 대한 매출·영업이익 의존도가 지나치게 크다. 소수 빅테크의 구매 결정 하나가 글로벌 메모리 수급을 좌우하는 구조가 됐다는 얘기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엔비디아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전체의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 대형 고객사의 구매량과 공급가격이 실적에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
빅테크의 자체 메모리 개발 움직임도 위험 요인이다. 구글은 AI 서버용 맞춤형 반도체(TPU) 생태계를 확대하고 있으며, 아마존웹서비스(AWS) 또한 트레이니엄(Trainium)과 인퍼런시아(Inferentia) 기반 자체 AI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MS)도 AI 데이터센터 투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메모리 구조 최적화 연구를 확대하는 상황이다. 아직 HBM을 대체할 기술은 부재하지만, 고객사가 장기적으로 특정 공급사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은 메모리 업체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중국 변수도 무시하기 어렵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DDR5 양산 확대와 생산능력 증설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기반으로 기술 격차 축소에 나서고 있다. 이미 범용 D램 영역에서는 중국 업체의 존재감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가 지속되는 동안 첨단 HBM 진입은 제한적이지만, 중국 업체들이 범용 제품 공급을 확대할 경우 일부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 압력이 재차 높아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업계 안팎에서는 AI 호황 속 본격화되는 설비 증설 경쟁이 중장기적으로 또 다른 공급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I가 전방 수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여전히 대규모 장치 투자가 선행되는 대표적인 공급 산업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사이클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마이크론은 버지니아 공장에 이어 아이다호주와 뉴욕주에 총 2,000억 달러(약 302조원) 규모의 신규 팹 건설을 추진 중이다. 업계에서는 호황기 이후 대규모 설비가 동시에 가동되는 시점에 AI 빅테크들의 투자 속도 조절까지 맞물릴 경우 시장 전체가 급격한 공급 과잉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신기술에 의한 경기 사이클 소멸 주장, 버블 꺼지며 ‘신경제’ 이론도 자취 감춰
더군다나 현재 시장에서 제기되는 낙관론에는 1990년대 말 미국의 신경제 담론과 같은 위험한 확신이 깔려 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인터넷과 정보기술(IT) 혁명이 경제의 작동 원리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개인용 컴퓨터 보급과 인터넷 상용화, 소프트웨어 산업 성장으로 생산성이 급격히 개선되자 월가와 학계에서는 과거 산업화 시대의 경기순환 법칙이 약해지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1991년 경기침체 이후 10년 가까운 확장 국면을 이어갔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충격도 비교적 빠르게 흡수했다.
당시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 역시 IT 혁신이 생산성 향상을 이끌고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시장은 이를 '경기 체질 개선'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실업률은 4% 안팎까지 하락했고 물가 상승 압력도 제한됐다. 경제 성장과 저물가가 동시에 이어지는 이례적인 환경 속에서 미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단계에 진입했다는 담론이 바로 신경제다.
주식시장도 이러한 기대를 반영했다. 투자자들은 기업의 이익보다 인터넷 이용자 수와 시장점유율 확대 가능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적자를 기록하는 기업들까지도 미래 성장성을 이유로 천문학적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에 나스닥 지수는 1995년부터 2000년 초까지 400% 이상 급등했고, 기술 혁신이 기존 경제 질서를 대체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시장 전반을 지배했다.
그러나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시장의 시각은 급격히 달라졌다. 인터넷 혁신 자체는 실재했지만, 기업 가치와 투자 규모는 결국 수익성과 현금흐름이라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뒤이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발생하면서 경기순환이 사라졌다는 주장은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기술 발전이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는 있어도 투자 사이클과 자산가격 변동까지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현재 메모리 시장을 둘러싼 ‘AI 슈퍼사이클’ 담론도 유사한 기대 구조 위에 서 있다. 공급 부족과 장기계약, 빅테크 자본지출 확대가 가격 하락 가능성을 밀어내고 있다는 인식이 시장 전반에 퍼지고 있다. 하지만 AI 인프라 투자의 지속성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JP모건은 주요 빅테크의 AI 관련 자본지출이 2026년 6,500억 달러(약 980조원)에서 2027년 1조1,000억 달러(약 1,660조원)로 확대될 것으로 추정했고, 2030년까지 전체 AI 투자 규모가 5조5,000억 달러(약 8,300조원)에 달할 수 있다고 봤다. 골드만삭스 또한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영사) 투자가 2026년 7,700억 달러(약 1,160조원) 수준에 이르며 영업현금흐름 대부분을 흡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AI 투자가 현금흐름 내부에서 감당되는 단계를 지나 채권·주식시장 조달에 기대기 시작하면, 메모리 수요는 기술 수요보다 금융 여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미 AI 인프라 생태계는 부채 의존도를 급속도로 키우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해 AI·데이터센터 관련 부채 발행은 3,000억 달러(약 453조원)를 웃돌았고, 2030년까지 AI 자본지출 5조5,000억 달러 중 4조1,000억 달러(약 6,200조원)가 부채로 조달될 것으로 추산된다. 엔비디아도 최근 대규모 회사채 발행에 나서며 AI 인프라 경쟁의 자금 조달 방식이 현금흐름 중심에서 자본시장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금리, 신용스프레드, 투자자 위험선호가 흔들릴 경우 HBM 장기계약과 데이터센터 발주도 동시에 재조정될 수 있는 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