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약세] 원·달러 환율, 韓 펀더멘털과 괴리? 자본 유출 고착화 속 펀더멘털 추락
[원화 약세] 원·달러 환율, 韓 펀더멘털과 괴리? 자본 유출 고착화 속 펀더멘털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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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선트 “과도한 환율 변동성 우려” 미국 주식 투자 과열, FDI는 3개분기 연속 마이너스 기업 이전 확산에 따른 경제 기반 약화도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최근 한국 원화 가치 하락이 한국의 경제 기초여건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한국 외환시장에 대한 미 재무장관의 이례적 발언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자본 흐름의 균열을 정조준한 신호로 해석된다. 최근의 원화 약세는 달러 강세의 반사효과라기보다, 해외 투자 확대와 국내 성장 둔화가 맞물린 결과다.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해외 주식 투자 확대와 기업의 생산기지 이전이 달러 수요를 구조적으로 키우며 환율 상방 압력을 고착화시키는 모습이다.
美 재무 "원·달러 환율, 한국 펀더멘털과 부합하지 않아"
14일(이하 현지시간) 베선트 장관은 소셜미디어(SNS) 엑스(X) 게시글과 미 재무부 성명을 통해 전날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회동에서 최근 원화 가치 하락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원화 약세는 한국의 강한 경제 기초여건과 맞지 않는다”며 “외환시장의 과도한 변동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베선트 장관은 수십 년간 헤지펀드업계에서 활동한 외환 전문가 출신으로, 특정 환율 수준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최근 일본 엔화 약세와 관련해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과의 대화에서 엔화의 일방적 약세에 대한 우려를 공유한 사실이 알려지며, 아시아 통화 전반에 대한 경계 신호라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 9개월간 달러는 주요 선진국 통화 대비 약세를 보였지만, 일부 아시아 통화는 예외였다. 같은 기간 엔화는 9% 이상 급락했고, 원화 역시 약 3% 하락했다.
미 재무부는 성명을 통해 베선트 장관과 구 부총리가 회동에서 핵심 광물 협력과 양국 간 경제 관계 강화 방안도 논의했다고 밝혔다. 특히 베선트 장관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산업에서의 한국의 강한 경제 성과를 고려할 때, 한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핵심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베선트 장관의 이례적인 구두 개입은 한·미 간 합의에 따른 3,500억 달러(약 512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에 고환율이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서인 것으로 풀이된다. 재무부는 베선트 장관이 구 부총리와의 면담에서 원화가치 문제와 함께 한미 간 무역 및 투자 협정을 완전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했다. 베선트 장관은 이 협정이 “이행이 순조롭게 진행돼야 한다”면서 “협정이 미국과 한국의 경제 파트너십을 더욱 심화하고, 미국 산업 역량의 부흥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화 가치의 과도한 약세 때문에 한국의 대미 투자 이행이 차질을 빚어선 안 된다는 인식을 구 부총리에게 강조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자본 해외 유출 확대, 외국인 직접투자도 감소
원화는 지난해 말 한국 당국의 시장 개입과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 영향으로 달러당 1,420원 수준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연초에 다시 약세 압력이 커져 12월 24일 이후 10거래일 연속 하락했다. 이번 베선트 장관의 발언 전 달러당 1,470원선에서 거래되며 17년 만에 최저 수준에 가까워졌으나, 발언이 나온 이후 원화는 최대 1.15% 반등한 1,462원까지 올랐다.
고환율이 지속되고 있는 데는 달러 강세보다는 원화 약세 영향이 더 크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원화의 실질실효환율(REER)은 90.14로, 기준치(100)를 크게 하회하고 있다. 이는 주요 교역국 통화 대비 원화의 구매력이 낮아졌다는 뜻이다. 여기엔 해외 투자 확대라는 구조적 원인이 자리한다. 경상수지 흑자 등 달러 유입과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에도 불구하고, 해외 증시 투자를 위한 달러 환전 수요가 더 크다는 점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말 정부가 국내 복귀 서학개미 비과세 혜택 등 세제 지원책까지 내놨지만, 미국 주식 투자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는 분위기다. 정부의 세제 혜택보다 미국 주식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게 더 유리할 것이란 기대감이 큰 탓이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달러를 옥죄면 환율이 안정화될 것으로 판단한 금융당국은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투자를 압박했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2일에도 점검회의를 열고 “외화 금융상품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며 “금융사 경영진 면담을 통해 해외투자 마케팅 및 이벤트를 자제하도록 지도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달 24일 강력한 구두개입과 환율 안정화 대책을 내놓은 후 환율이 1,480원대에서 1,420원까지 급락한 건 오히려 서학개미들에게 있어 달러 저가 매수·미국 주식 투자 확대 기회가 됐다. 환율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은행권 달러예금과 달러보험 가입도 증가했다. 5대 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 달러예금 잔액은 지난해 10월 말 572억 달러(약 84조1,800억원) 수준까지 줄었다가 이후 2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지난달엔 한 달 새 68억8,170만 달러(11.4%)나 급증했다. 지난해 5대 은행의 달러보험 누적 판매액도 총 1조7,292억원으로, 직전 해인 2024년 전체 판매액(9,613억원)의 2배에 달했다. 달러를 최대한 많이 보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이미 투자자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다.
원화 가치 하락이 장기간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이 달러를 들여와 국내 공장 설립이나 기업 인수에 나서는 직접투자(FDI) 유치도 큰 폭으로 줄었다. 국가데이터처(옛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FDI 유치실적(신고 기준)은 75억7,000만 달러(약 11조1,500억원)로 전년 대비 23.1%(22억7,700만 달러) 감소했다. 작년 1~3분기 누적 FDI는 206억7,0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45억1,200만 달러(17.9%) 감소했다. FDI 신고액은 지난해 1분기 이후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감소폭도 1분기 -9.2%, 2분기 -19.1%, 3분기 -23.1% 등으로 갈수록 커지는 형국이다. FDI 신고액에는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공장 설립이나 한국 기업의 경영권 취득 등이 포함되는데, 이 과정에서 달러를 들여와 원화로 환전하기 때문에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공급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기업들 탈한국 기조도 뚜렷
환율 상승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국내 성장 엔진 둔화와 자본 유출 구조의 불균형이다. 한때는 한국에 공장을 짓고, 본사를 두고, 연구개발(R&D)센터를 세우는 것이 기업 성공의 기본이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기류가 흐른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조사에 따르면 2025년 초 기준으로 전 세계 84개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9,930개에 달한다. 단순하게 물건을 팔기 위해 나가 있는 판매법인이 아니라 제조나 생산 법인의 해외 진출 비중이 28.4%로 가장 높았다. 수출이 아닌 생산 공장 자체를 해외에 세우는 기업들이 계속 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난해 국내 복귀를 결정한 기업은 단 24곳에 불과했다. 2021년 26곳보다 오히려 더 줄었다. 정부가 2014년부터 '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 지원에 관한 법률'을 통해 유턴 기업 늘리기에 나선 이후 지난해까지 9년간 한국으로 복귀한 기업은 126곳에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해외 신설 법인은 2만6,406곳으로 집계됐다. 국내 기업들이 국내 투자 보다는 탈(脫)한국에 집중했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탈한국 기조가 가장 뚜렷한 업종은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분야다. 특히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등은 한국 기업을 끌어모으는 자석 역할을 하고 있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20조원을 들여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데,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건설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행을 택했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는 미국 내 배터리 합작 공장을 10곳 넘게 추진 중이다. 현대차·기아와도 손잡았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공장과 배터리셀 공장을 짓기 위해 총 31조원 규모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는 단일 해외 투자로는 그룹 역사상 최대 규모다.
이들 기업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탈한국 배경은 미국의 보조금 정책, 거대 시장에 대한 접근성, 정치·규제 리스크 관리다. 한국에서는 기술 개발만 하고, 실제 돈은 미국에서 벌겠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예외가 아닌 뉴노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에만 국한된 흐름도 아니다. 중견·중소 제조업체들 역시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로 줄줄이 탈출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고, 전기요금도 오르고 있는데 설비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은 줄고 있다. 반면 동남아는 3분의 1 수준 인건비에 더해 세금 감면, 산업단지 제공 등 혜택이 풍부하다.
규제 환경도 비교할 수 없다. 한국은 환경영향평가, 노사협의, 주민동의, 행정소송 등 공장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통상 2~3년이 걸리지만, 동남아에선 몇 달이면 끝난다. 더 심각한 것은 본사 자체를 해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다. 스타트업계에서는 이미 ‘싱가포르 법인 전환’이 유행이다. 실리콘밸리, 런던, 두바이로 연구조직을 옮긴 기업도 많다. 이유는 단순하다. 투자받기 좋고, 인재를 뽑기 쉬우며,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더 이상 기업 운영에 있어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