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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어가는 EV·불타는 AI, 글로벌 산업 지형 뒤흔드는 대규모 머니무브

식어가는 EV·불타는 AI, 글로벌 산업 지형 뒤흔드는 대규모 머니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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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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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의 AI 라인 전환 검토와 일본의 반도체 총력전
닛산·토요타 배터리 투자 철회, 그 빈자리 대체하며 급부상한 AI 데이터센터
'EV 엑소더스'와 AI로의 거대한 자본 이동, ESS·하이브리드로 활로 찾는 기업들

글로벌 산업의 무게중심이 전기차(EV)에서 인공지능(AI)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생산 라인을 차량용에서 AI용으로 전환하며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고 유럽은 규제 완화를 통해 글로벌 빅테크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등, 각국의 정책 변화와 수요 둔화로 전기차 시장은 숨 고르기에 들어간 반면 AI에는 막대한 자본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전기차 시장의 불확실성과 AI 산업의 급성장이 맞물린 이러한 자본의 흐름은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예고하며 기업과 국가에 새로운 생존 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TSMC 2공장 AI용 전환 유력, 전력·인재 총력전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2025년 규슈의 자동차·반도체 산업에서 계획 변경이 잇따르고 있다"며 "TSMC가 구마모토 제2공장의 생산 품목을 기존 차량용에서 AI용 최첨단 반도체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당초 6나노(nm·10억분의 1m)급 차량용 반도체를 주력으로 계획했던 제2공장은 최근 4나노 이하의 최첨단 미세공정과 첨단 패키징(CoWoS) 라인 도입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지난 10월 착공에 들어갔음에도 지난달 말부터 현장 공사가 다소 정체된 배경에는, 이러한 설계 변경 검토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가 구마모토 제1·2공장에서 월 10만 장(12인치 웨이퍼 기준)의 생산능력을 예고한 가운데, 일본 정부는 1조2,000억 엔(약 11조원) 이상을 투입해 민관 합작 ‘AI 반도체 요새화’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같은 반도체 거점 구축은 데이터 인프라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져, 2023년 2조8,000억 엔(약 25조6,000억원) 규모였던 일본 데이터센터 시장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해 2026년 4조 엔(약 36조6,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에 따른 전력 수급난이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자 대응책 마련도 빨라지고 있다. 일본 전력광역운영추진기관(OCCTO)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의 합산 전력 수요가 2025년 36억 kWh(킬로와트시)에서 2034년 514억 kWh로 14배가량 폭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전력망 확충을 핵심 산업정책으로 격상해 기타큐슈 해상풍력발전소 확장에 5,100억 엔(약 4조6,000억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지역 기업들 또한 대형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에 뛰어들며 전력 수급 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닛산 백지화·토요타 연기, EV 빈자리 데이터센터가 채운다

반도체 분야의 공격적인 확산세와 달리, 같은 규슈 내 EV 배터리 투자는 급제동이 걸렸다. 일본 닛산자동차는 당초 후쿠오카현에 1,533억 엔(약 1조 4,000억원)을 투자해 연산 5GWh(기가와트시) 규모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공장을 짓고 500명을 고용하려던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세계 1위 완성차 업체인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행보도 신중해졌다. 토요타는 지난 2월 후쿠오카현 간다마치 공업단지 내 28만㎡ 부지를 취득하고 올해 착공해 2028년부터 렉서스용 차세대 배터리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토요타는 착공 시기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며 공장 건설을 당분간 연기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이에 따라 2026년으로 예정됐던 차세대 전기차 출시 시점 또한 2027년 중반 이후로 미루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번 연기는 전기차 수요 둔화와 차세대 배터리 기술의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당초 토요타는 이 공장을 고급 브랜드 렉서스의 핵심 공급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글로벌 수요 정체와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 속에서 수익성 확보가 불투명해졌다. 기술적 난관도 발목을 잡았다. 1회 충전 시 1,000㎞ 주행이 가능한 차세대 배터리 개발이 지연되면서, 신차 탑재 시점과 공장 가동 일정이 연쇄적으로 밀리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내년 150만 대, 2030년 350만 대로 설정했던 토요타의 글로벌 전기차 판매 목표 달성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이는 완성차 업계가 설비투자(CAPEX)의 우선순위를 단순 배터리 증설에서 전장 소프트웨어 및 하이브리드 고도화로 재배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EV 투자가 빠져나간 자리는 AI 데이터센터와 이를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우드맥킨지는 일본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34년 57~66 TWh(테라와트시)에 달하고, 피크 수요는 6.6~7.7 GW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과거 국가 전력 수급 계획의 핵심 변수가 전기차 충전 전력이었다면, 이제는 거대 데이터센터가 전력망 계획의 최대 상수로 부상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관측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22년 460 TWh에서 2026년 1,000 TWh 수준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예측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 구축에 필요한 설비투자가 6조7,000억 달러(약 9,607조1,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전기차 산업이 배터리와 충전 인프라 중심의 게임이었다면, AI 산업은 전력 공급, 냉각 시스템, 부지 확보를 둘러싼 인프라 게임으로 산업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모양새다.

美 포드 계약 해지·EU 규제 완화에 EV 엑소더스: 배터리는 ESS로, 자본은 AI로

산업 중심축의 이동은 글로벌 공급망 붕괴라는 구체적인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17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완성차업체 포드는 LG에너지솔루션과 맺었던 65억 달러(약 9조3,000억원) 규모의 배터리 공급 계약을 전격 해지했다. 앞서 SK온과의 합작 사업 구조를 분리한 데 이어, 이미 체결된 조 단위 계약까지 파기한 것은 EV 시장의 침체가 단순한 조정기를 넘어 밸류체인 전반의 구조조정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러한 'EV 엑소더스'의 이면에는 주요국의 급격한 정책 후퇴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지난 9월 30일부로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전기차 구매 보조금 지급을 조기 중단했고, 그 여파로 10월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30% 급감했다. 판매 부진으로 16억 달러(약 2조2,000억원)의 손실을 입은 미국의 주요 자동차 제조업체 제너럴모터스(GM)는 배출가스 규제 무력화 로비에 나섰으며, 글로벌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AlixPartners)는 미국의 2030년 EV 판매 비중 전망치를 기존의 절반 수준인 18%로 하향 조정했다. 캐나다와 유럽 또한 속도 조절 대열에 합류했다. 캐나다는 내년 시행 예정이던 EV 판매 의무화를 전격 중단했고, 유럽연합(EU)은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그룹의 대규모 감원 충격이 현실화되자, 2035년 내연기관 완전 퇴출 목표를 ‘90% 감축’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한발 물러섰다.

전기차 시장이 정책 후퇴와 수익성 악화로 주춤하는 사이, 글로벌 투자 지형 역시 AI와 방산 등 미래 기술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미국 빅테크에 뒤처질 수 있다는 '포모(FOMO·소외 공포감)' 심리와 지정학적 안보 불안이 맞물려, 올해 유럽 벤처캐피털(VC) 투자는 사상 최고치인 570억 달러(약 81조7,000억원)를 기록했고 12개의 신생 유니콘이 탄생하는 등 자본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이러한 ‘유럽발 AI 붐’에 발맞춰 미국 빅테크들의 인프라 투자 공세도 거세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등이 수조원대 투자를 단행하는 배경에는 EU의 절박한 규제 기조 변화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시장 잠식 우려보다는 산업 생태계 육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EU가 조만간 ‘규제 단순화 패키지’ 도입을 예고하면서, 규제 장벽이 낮아진 유럽으로의 자본 유입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완성차 업체의 투자 축소는 배터리 제조사의 수주 가뭄이라는 연쇄 파장을 낳고 있다. 이에 국내 배터리 3사는 가동률이 떨어진 전기차 라인을 AI 데이터센터용 ESS 라인으로 전환하며 생존을 모색 중이다. 다만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재생에너지 확산으로 ESS 수요가 늘고는 있지만, 전체 산업에서 전기차 배터리 비중이 여전히 절대적"이라며 "전기차 수요 회복 없이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국내 완성차업계 역시 파워트레인 다변화와 신차 투입으로 파고를 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시장에서 팰리세이드 등 대형 SUV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강화하고, 유럽에서는 인기 모델의 하이브리드 비중 확대와 보급형 전기차 투입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에 따르면, 올해 1~11월 현대차·기아의 유럽 누적 판매량은 95만 9,317대로 전년 동기 대비 2.6% 감소해 시장 침체의 여파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글로벌 자본이 전기차에서 AI 인프라로 이동하는 거대한 머니무브 속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규슈를 중심으로 반도체·전력망·데이터센터를 아우르는 'AI 요새'를 구축 중인 일본과 달리, 한국은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와 전력 공급 불확실성 탓에 글로벌 빅테크의 투자처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김채윤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데이터센터 산업은 단순한 시장 확대를 넘어 국가 산업정책 전반을 재편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며 "한국도 이를 벤치마킹해 AI 인프라 경쟁력을 시급히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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