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고물가·저성장 ‘3중 쇼크’ 직면,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재점화
고환율·고물가·저성장 ‘3중 쇼크’ 직면,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재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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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상승률 2%대 지속 원화 약세 흐름 반전 기대 어려워 고환율 장기화 리스크도 여전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견조한 성장세와 낮은 물가를 동시에 누리는 사이, 대한민국 경제는 고환율·고물가·저성장이라는 삼중고에 갇혀 홀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과거 미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던 역동성은 사라졌고, 실질 가치를 반영한 환율은 외환위기 직후 수준까지 추락하며 경제 펀더멘털의 훼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조차 자본 유출을 막지 못하는 현 상황은 한국 경제가 체질적 붕괴 단계에 직면했음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韓 성장률 4년째 세계 평균 하회
22일 한국은행과 국제기구 통계를 종합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1년 이후 4년 연속으로 세계 평균을 밑돌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와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달 한은은 올해와 내년 한국의 성장률을 각각 1.0%, 1.8%로 전망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한국이 올해와 내년 각각 1.0%, 2.1%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OECD의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올해 3.2%, 내년 2.9%에 이른다. OECD는 올해 중국이 5.0%, 미국이 2.0%, 일본은 1.3% 성장할 것으로 뵜다. 미국 경제 전망은 한층 더 낙관적이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올 연말 미국이 3% 성장률로 마무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0여 년 전 한국이 미국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던 구도가 완전히 역전된 모양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10일(이하 현지시간)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내년 미국의 성장률은 올라가고 물가는 낮아질 것으로 봤다.
이에 해외에선 글로벌 경제가 골디락스(Goldilocks) 국면에 본격 진입했다는 분석이 비등하다.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상태’란 뜻으로 높은 성장률과 낮은 물가, 낮은 실업률이 공존하는 이상적 경기 호황을 뜻한다. 글로벌 자산 운용사 베어링자산운용은 15일 발간한 ‘2026년 글로벌 거시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글로벌 경제는 경기 침체 없이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 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한국은 물가 상승세에 비상등이 켜진 상태다. 지난 9월 2.1%대에 오른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10∼11월 연속으로 2.4%를 기록했다. 특히 일상생활에 밀접한 품목에 대해 따로 산출하는 생활물가지수는 지난 9∼10월 2.5%를 기록하다 11월에는 2.9%까지 오르며 최근 1년 4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물가 상승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떨어뜨려 소비를 위축시키고, 이는 다시 기업 실적 악화와 고용부진으로 이어져 경기 회복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경기 둔화를 넘어 침체 국면으로 재진입할 위험도 거론된다.
고환율이 고물가 실물경제로 전이
이런 상황에서 원·달러 환율까지 고공비행을 계속하면서 물가에 상방 압력을 더하고 있다. 한은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주간 거래 종가 기준 지난달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60.44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외환위기였던 1998년 3월(1,488.87원) 이후 월평균 기준으로 최고치다.
이에 정부와 외환당국이 세 차례에 걸쳐 환율 안정 대책을 가동했지만 원·달러 환율은 더 오르는 추세다.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오후 1시 30분 기준 전 거래일 대비 3.20원 오른 1,481.20원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17일 장중 1,480원대를 돌파한 이후 또 돌파한 것이다. 원화 약세는 주요국 통화와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이달 들어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0.69% 하락했지만, 호주 달러(+1.56%), 캐나다 달러(+1.50%), 유럽연합(EU) 유로(+1.20%), 영국 파운드(+0.94%), 일본 엔(+0.17%) 등 주요국 통화는 모두 강세였다.
환율 상승과 고물가, 저성장이 서로 맞물린 복합 위험은 기업과 유통 현장에서 동시에 확인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년 기업경영 환경 인식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과반은 내년 경영 여건을 “어렵다”고 내다봤다.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위험 요인은 환율 변동성 확대와 물가 부담, 그리고 이에 따른 내수 회복 지연이었다. 수출 기업은 비용 압박을, 내수 기업은 수요 둔화를 동시에 우려하는 모습이다.
이 같은 인식은 대한상공회의소의 유통시장 전망 조사에서도 반복됐다. 대한상의는 2026년 소매유통시장 성장률을 0.6%로 제시하며, 고환율·고물가가 소비 여력을 제약해 내수 회복을 늦출 가능성을 핵심 배경으로 들었다. 기업과 소비의 접점에 있는 유통 현장에서 체감하는 경기 냉각이 이미 상당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우려는 심리를 넘어 숫자로도 확인된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실질실효환율(REER·2020년=100)은 최근 87 수준까지 하락해, 외환위기 직후와 유사한 실질 가치 하락 국면에 근접했다. 명목환율이 아니라 물가를 반영한 체감 환율이 이미 위기 수준에 다가섰다는 의미다.

자본 유출과 체질적 취약성
더 큰 문제는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상 원화 가치 하락이 물가를 계속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원화 약세가 지속될 경우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수입 물가다. 한은에 따르면 11월 기준 수입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2.6% 올랐다. 지난 7월 이후 5개월 연속 상승세로, 상승률도 지난해 4월(+3.8%) 이후 1년 7개월 만에 최고 수준이다. 통상 수입물가는 3~6개월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준다. 여기에 외국인 자금 이탈, 기업 수익성 악화, 투자 위축 등이 연쇄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고환율은 펀더멘털을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 펀더멘털을 훼손하는 단계에 와 있다. 환율 상승이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 상승이 실질소득과 소비를 줄여 성장률을 떨어뜨리면, 다시 한국 자산에 대한 매력이 줄어 원화 약세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업 경쟁력 강화에 따른 투자 기반이 마련돼야 하지만, 중국의 거센 추격으로 인해 반도체·배터리·조선 등 주력 산업의 수익성과 시장 지위는 예전만 못한지 오래다. 원화 자산의 기대수익률이 떨어지면서 시장이 원화를 '성장하는 통화'가 아닌 '정체된 통화'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의 추격은 앞으로 더 가팔라질 전망이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따르면 중국이 현재 앞서고 있는 분야에서는 격차가 확대되고 현재 한국이 앞서고 있는 반도체는 물론 전기·전자, 선박, 석유화학·석유제품, 바이오헬스에서는 우위가 뒤집힐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국은 가격 경쟁력, 생산성, 정부 지원, 전문 인력, 핵심 기술 등에서 한국을 앞섰고, 상품 브랜드만은 한국이 우위지만 이마저도 5년 뒤엔 역전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수출 의존형 경제인 한국이 존재감을 잃는 이유로 단기 경기 사이클보다는 산업 기반 약화를 지목한다.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는 과도한 규제와 과잉 입법, 낮은 노동생산성 등이 기업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다. 특히 유연하지 못한 노동시장, 높은 준조세 부담, 복잡한 규제 체계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비교해 비용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신뢰 저하도 투자 매력을 상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올해 11월까지 900억 달러(약 133조원)의 경상수지 흑자를 냈지만 해외 직간접 투자로 1,500억 달러(약 222조원)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에도 환율이 고공 행진하는 것은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아닌 경제 체질의 취약성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다. 투자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풀지 않는 것 역시 원화 가치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