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달러 연결 고리가 키운 신흥국 취약성
[딥파이낸셜] 달러 연결 고리가 키운 신흥국 취약성
입력
수정
달러 중심 금융망 속 연결 구조가 신흥국 충격을 증폭 정책 여건 개선에도 미국 금융 변화는 실물 거래에 직접 전달 외환시장과 결제 구조를 함께 보완해야 취약성 완화 가능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 달러는 전 세계 외환거래의 약 90%에 사용된다. 국제 거래와 환위험 헤지, 국경 간 결제가 달러를 기준으로 이뤄지는 구조에서 미국의 금융 불안은 달러 자금 조달 경로를 따라 다른 국가로 확산된다. 이러한 영향은 수출입 비중이 높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특히 크게 나타난다. 원자재 수입과 제품 수출, 대금 결제와 환위험 관리가 모두 달러에 의존하는 만큼 실물 거래와 금융 거래가 동일한 통화 체계 안에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호연결성은 신흥국의 위기 대응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물가 안정과 금융 규제 측면에서 정책 체계는 과거보다 정교해졌지만, 글로벌 금융 충격 국면에서는 정책의 완성도보다 교역 통화 구조와 외화 결제 비중, 단기 외화 자금 의존도가 충격의 크기를 결정한다.
정책 개선과 네트워크 한계
최근 신흥국이 글로벌 금융 충격을 과거보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흡수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물가 목표제 도입과 환율 유연화, 거시건전성 정책 강화가 금융 전염을 완화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과 비교하면 성장률과 물가의 변동성은 줄었고, 중앙은행의 정책 운용도 임시적 대응보다 정책 기준에 따른 운용 비중이 확대됐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금융 환경과 함께 나타난 측면이 크다. 장기간 지속된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은 정책 개편의 부담을 완화했다. 금융 환경이 긴축으로 전환되면 국가의 안정성은 정책 수준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위기 상황에서는 경제가 국제 금융과 실물 교역에 얼마나 깊이 연결돼 있는지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외부 충격을 더 빠르게 받는다.
이러한 연결 구조 속에서 위기 대응의 성격도 달라진다. 달러 유동성이 위축될수록 기업과 가계의 자금 흐름은 불안해진다. 외화 결제와 무역이 얼마나 지속되는지가 금융 충격이 실물경제로 전이되는 속도를 결정한다. 정책 여건이 비교적 양호한 국가 역시 달러와 미국 금융 여건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 구조의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동일한 제도 아래에서도 국가별 충격이 달라지는 이유다. 정책은 충격을 완화할 수 있지만, 노출의 범위는 국제적 연결 구조가 규정한다.

주: 금융 불안 국면에서는 자본 유출과 환율 변동이 나타나고 차입 비용이 상승하며, 실질 GDP 성장률은 하락한다. 반면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반응을 보인다.
달러 의존 구조가 만든 취약성
많은 신흥국은 외화보유액을 확대했고, 1990년대에 비해 국외 자본 의존도도 낮아졌다. 겉으로 보면 위기 대응 여력은 이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금융 구조의 핵심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의 달러 차입은 다시 증가했고, 국채 가격 역시 미국 금융 여건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기업과 은행의 자금 조달이 여전히 달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는 외화보유액 확대만으로 충격을 흡수하기 어렵다. 달러 부채에 대한 헤지도 늘었지만, 금융 환경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2018년 이후 달러 강세나 미국의 긴축 전환 국면마다 신흥국 금융 여건은 동시에 압박을 받았다.
무역 결제 구조 역시 이러한 취약성을 강화한다. 전 세계 수출의 절반은 거의 달러로 결제되며, 이는 미국의 세계 교역 비중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이 구조는 2023년까지도 유지됐다. 그 결과 기업이 현지 통화로 자금을 조달하더라도 가격 변동과 자금 조달 비용은 달러 시장을 통해 전달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외환 스왑·선도 시장의 미결제 잔액은 100조 달러(약 14만7,850조원)에 달한다. 이 시장이 위축될 경우 자금 조달 부담은 금융 부문을 넘어 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전반으로 확산된다.

주: 금융 불안 국면에서 신흥국의 회복력은 주로 정책 체계 개선에 의해 설명되며, 대외 여건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커지는 충격
이러한 구조는 한국 사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국은 수출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40~45%에 이르고, 2023년 기준 총교역 규모도 GDP의 약 90%에 달하는 전형적인 소규모 개방경제다. 전자, 자동차, 화학, 해운 등 주요 산업이 세계 시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기업이 원화로 자금을 조달하더라도 원자재 구매와 제품 판매 가격은 달러나 유로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미국 금리 인상이나 달러 유동성 축소는 기업의 현금 흐름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선지급 조건과 환위험 관리 비용이 변하고, 결제 일정도 함께 조정된다.
충격의 크기는 금융 연결이 얼마나 유지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환위험 관리 거래의 이행 여부, 거래 상대방의 자금 공급 지속성, 외환 스왑 시장의 가격 형성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작동에 차질이 생길 경우 금융 충격은 실물 부문으로 빠르게 전이된다. 상호연결된 금융 네트워크가 충격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글로벌 금융 구조 역시 이러한 전파를 강화한다. 미국 외 지역에서 비달러 통화로 제공된 대출 규모는 약 13조 달러(약 1경9,220조원)에 이른다. 이 대출은 단기나 중기 만기가 많아 금융 여건 변화 시 차환과 금리 재조정이 동시에 발생하기 쉽다. 여기에 글로벌 금융 여건이 미국의 통화정책과 위험 선호 변화에 따라 함께 움직이면서 충격은 확대된다. 물가 기대가 비교적 안정적인 상황에서도 이러한 경로는 유지된다. 국내 정책은 충격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만,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통한 전파 자체를 차단하기는 어렵다.
네트워크를 전제로 한 정책 방향
소규모 개방경제의 정책 설계는 외환 거래의 역할을 전면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외환 스왑과 선도 시장이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경우 달러 유동성 부족은 곧바로 무역과 결제로 이어진다. 감독 당국은 비은행 딜러를 포함해 외환 시장 전반의 거래 구조와 유동성 흐름, 급격한 달러 자금 축소 국면에서도 거래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시장이 취약해지는 구간에는 가격 변동이 과도하게 확대되지 않도록 사전에 정해진 범위의 유동성 장치를 마련해 거래 중단과 급격한 왜곡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2020년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 스왑 확대가 외환시장 불안을 완화하고 거래를 유지한 사례는 이러한 접근의 효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장치에 접근하기 어려운 국가는 지역 차원의 공동 유동성 체계나 상시적 환율 안정 수단을 검토할 수 있다.
금융 규제 역시 상호연결된 구조를 기준으로 조정돼야 한다. 은행에 적용되는 외화 유동성 관리 기준은 단기 외환 파생상품 비중이 높은 기업에도 위험 수준에 따라 확대 적용할 수 있다. 헤지 거래의 만기와 실제 현금 흐름을 일치시키고, 담보 없는 외화 포지션을 제한하며, 외환 증거금 운용 현황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기준이 요구된다. 이는 위기 국면에서 외환 거래가 시장 불안을 확대하는 경로를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외환시장 조정과 자본 흐름 관리, 금융 규제를 병행하는 방식은 금융 안정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다만 적용 범위와 기간을 명확히 하고, 정상화 경로를 함께 제시하는 방식으로 운용돼야 한다.
결제와 무역을 지키는 장치
정책 대응은 금융 시장을 넘어 실물 거래가 이어지는 구조까지 확장돼야 한다. 글로벌 금융 불안이 발생하면 달러 유동성 축소는 자금 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거래 지연과 계약 조정으로 전파된다. 정부의 역할은 이러한 충격이 실물 경제로 확산되는 구간을 관리하는 데 있다.
수출 신용기관과 개발은행은 중소기업이 환율 변동에 대응할 수 있도록 외환 헤지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 재무 당국은 금융 시장이 불안정한 국면에서도 기업 간 결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담보 관리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무역 관련 기관은 역내 교역에서는 자국 통화 결제 비중을 높이고, 장거리 교역에서는 달러 사용을 전제로 위험 관리 수단을 보완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이러한 조치는 글로벌 금융 충격 시 거래 단절 가능성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교육과 행정 시스템 역시 실질적인 위험 구조를 반영해야 한다. 교육기관은 송장 통화 선택과 결제 방식, 헤지 기간이 자금 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다룰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은 달러로 결제되는 학술지, 장비, 소프트웨어 구매 과정에서 환율 변동을 고려한 계약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식량이나 연료를 해외 시장에서 조달하는 공공 부문 역시 비용 변동을 완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와 계약의 설계다. 외부 충격이 발생하더라도 달러 결제와 무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준비돼 있는지가 정책 점검의 기준이 된다. 이 지점이 취약할 경우 재정 여력이 충분하더라도 충격은 그대로 전이된다.
달러 중심의 글로벌 금융 구조가 유지되는 한, 신흥국은 외부 충격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정책 신뢰만으로는 이를 차단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외환시장과 헤지 관행, 유동성 지원, 무역 결제가 끊기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 설계다. 금융 네트워크를 기준으로 대응할 경우, 글로벌 충격은 관리 가능한 범위에 머물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Policy Illusion: Why Network Risk Still Rules Peripheral Economie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