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31·오커스 동시 좌초 위기, 英 해군력 흔드는 조선업 공동화
Type 31·오커스 동시 좌초 위기, 英 해군력 흔드는 조선업 공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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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31 비순차 조립 후폭풍, 수정 비용만 2,700억원 英 조선소 생산능력 한계, 오커스 핵잠 계획에도 발목 조선업 쇠퇴와 생산 한계가 드러낸 英 해군력 균열 조짐

한때 세계 해양을 지배했던 영국 왕립해군(Royal Navy)의 차세대 호위함 사업이 대규모 설계·조립 오류에 휘말리며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이는 영국 제조업이 직면한 인적 자본 고갈과 관리 감독 부실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이번 사태는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3국 핵잠수함 동맹) 사업 차질과 겹치면서 영국 해군력 전반의 신뢰도를 정면에서 흔들고 있다.
선도함 HMS 벤처러·2번함 액티브 동시 결함, 2023년 목표 → 2027년 → 또 지연
17일(현지시간) 군사 전문 매체 19포티파이브(19FortyFive)에 따르면, 영국 조선업체 밥콕 인터내셔널(Babcock International)은 왕립해군 차세대 범용 호위함 Type 31 인스퍼레이션급(Inspiration-class) 초기 2척을 '비순차(out-of-sequence)' 방식으로 조립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설계 변경이 누적된 상태에서 이미 조립된 구조물을 다시 해체·보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비용과 공정 부담이 급격히 커졌다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함정은 Type 31 프리깃 가운데 1번함 HMS 벤처러(HMS Venturer)와 2번함 HMS 액티브(HMS Active)다. 밥콕은 “재작업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됐던 부분”이라면서도 “완성 단계에 가까운 시점에서 수정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훨씬 복잡하고 비용 부담도 크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완성 단계에서 대규모 재작업이 불가피해졌으며, 수정 비용은 최대 1억4,000만 파운드(약 2,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Type 31 프리깃은 노후화된 Type 23 호위함을 대체하기 위해 추진 중인 영국 해군 핵심 전력 사업이다. 함정은 약 5,700톤급 규모로 헬기, 미사일, 무장 고속단정, 드론 등을 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대잠전·대해적 작전·밀입국 차단·고강도 해상전까지 광범위한 임무 수행을 목표로 한다. 영국 정부는 Type 31을 미래 ‘하이브리드 해군’ 전력의 핵심 플랫폼으로 규정해 왔다.
Type 31의 기본 제원은 탄탄하다. 전장 138.7m, 배수량 7,000톤 규모로, 최고속도 26노트 이상에 항속거리 7,500해리에 달한다. 영국 버전은 Sea Ceptor 대공미사일 12셀, 57mm 함포, 40mm 보포스 포 2문, 12.7mm 기관총 다수를 탑재한다. 향후 Mk41 수직발사체계(VLS) 장착을 통해 화력을 크게 강화할 계획이지만, 현재는 VLS 탑재 공간만 확보한 채 실제 장착은 이뤄지지 않은 '설치 준비만 된(fitted-for-not-with)' 상태다. 이는 애초 빠른 취역을 위한 결정이었으나, 취역 자체가 늦어지면서 의미가 퇴색됐다. 더욱이 향후 VLS 장착을 위해 또다시 대규모 개수가 필요하다는 점도 부담이다.
Type 31 사업의 일정 표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HMS 벤처러는 원래 2023년 취역이 목표였고, 12척 전 함정이 2030년대 초반까지 전력화될 예정이었다. 일정이 한 차례 밀려 2027년 취역으로 조정됐으나, 이번 조립 결함으로 그 목표마저 사실상 폐기됐다. 영국 해군 내부에서는 첫 실전 배치가 2030년대 이후까지 밀릴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더욱 뼈아픈 것은 타이밍이다. 영국 왕립해군은 현재 현역 함정 수보다 제독 수가 더 많다는 역설적 현실에 놓여 있다. 여기에 영국 해군은 최근 5년간 1억300만 파운드(약 2,000억원)를 투입해 개수한 노후 Type 23 듀크급 호위함 HMS 아이언 듀크(HMS Iron Duke·F234)까지 조기 퇴역시키기로 결정했다. 현재 실질 가동 가능한 Type 23 전력은 5척 수준으로,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고도 실전 전력화에 실패한 것이다. 가디언은 "Type 31은 영국 해군을 정상 궤도로 되돌릴 사업이어야 했지만, 지금은 영국 납세자들이 끝없이 돈을 쏟아붓는 또 하나의 바다 위 구멍이 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건조 역량 부족에 AUKUS도 차질 불가피
Type 31 지연은 또 오커스 핵잠수함 사업의 차질과도 맞물려 있다. 지난 2021년 영국, 미국, 호주는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맞서 인도·태평양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오커스를 출범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억제하는 데 필요한 핵추진 잠수함 역량을 강화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계획에 따라 미국은 2030년대 초부터 버지니아급 핵잠수함 최대 5척을 호주에 판매하기로 했고, 영국과 호주는 미국의 첨단 기술을 도입한 재래식 무장 핵추진 잠수함을 공동 개발해 각자 자국 조선소에서 건조하기로 했다. 영국은 2030년대 후반에, 호주는 2040년대 초반에 잠수함을 건조하는 게 목표다.
이 중 오커스 협정에서 호주가 도입할 핵추진 잠수함의 기반이 되는 SSN-AUKUS 함형을 영국이 먼저 설계·건조해야 하는데, 영국 조선업의 역량 부족이 Type 31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영국은 오커스 SSN-AUKUS 건조에 앞서 애스튜트(Astute)급 공격잠수함 추가 1척과 드레드노트급 핵탄도잠수함(SSBN) 4척을 배로인퍼니스(Barrow-in-Furness) 조선소에서 먼저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영국 조선 산업은 수십 년에 걸친 투자 부진과 방치로 생산 능력이 심각하게 위축된 상태다. 영국 유일의 핵잠수함 건조 거점인 배로인퍼니스 조선소는 인력 부족과 생산 능력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스튜트급 공격형 잠수함 사업과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전략핵잠수함 사업, 여기에 오커스 핵잠수함 개발까지 동시에 추진되면서 생산 부담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평가다.
최근 영국 의회 조사에서는 핵잠수함 가동률이 “위기 수준”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정비 시설 부족과 부품 수급 지연, 드라이 도크 부족 등이 누적되면서 유지·보수 일정 자체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잠수함 정비 지연 규모도 심각하다. 영국 해군은 2018년 이후 5억 파운드(약 6억6,500만 달러·약 9,300억원) 이상의 잠수함 유지·보수 작업을 완료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전략원잠은 계획된 수명을 넘겨 운용되고 있으며, HMS 뱅가드(HMS Vanguard)의 경우 정비 완료가 4년 이상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는 '조선업 르네상스'와 해군 현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정반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신형 호위함과 핵잠수함 사업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음에도, 건조 속도와 유지·보수 역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전력 공백이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되는 오커스는 영국 조선업 쇠락의 현실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영국이 자국 잠수함 생산 일정조차 맞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호주에 핵잠수함을 공급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다.
핵잠 병목 드러나자 일본 찾은 미국
미국이 일본의 오커스 협력 참여를 집요하게 추진하는 흐름 역시 영국 조선업의 한계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오커스는 앵글로색슨 국가들의 동맹인데, 여기에 일본이 합류하는 것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는 일본의 첨단 제조 역량과 정밀 부품 공급망, 해양 방산 기술력을 활용하지 않으면 오커스 잠수함 계획 자체가 일정 붕괴에 직면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앞서 미국은 이미 일본과 양자 차원의 잠수함·수중전·전자전 협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오커스 Pillar II(첨단기술 협력)에 일본 참여를 본격 검토한 바 있다.
일본은 중국과 대립하는 지정학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의 조선업 인프라와 숙련된 기술 인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국가다. 특히 일본은 군함·상선 건조 경험, 고급 특수강 생산능력, 정밀 용접·배관 기술, 잠수함 운용 노하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일본은 중국의 해군력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당장 실질적인 ‘배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술적 구원투수인 셈이다. 미국이 일본의 방산 협력 범위를 해양안보와 잠수함 분야까지 확대하려는 이유 역시 태평양 방어선 유지에 필요한 산업 역량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판단과 맞물린다.
반면 영국은 사실상 조선업 붕괴에 직면해 있고, 호주의 경우도 태평양 방어선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가치는 충분하나, 핵잠수함과 같은 초정밀 함정을 건조할 수 있는 독자적 기술 기반이 전무하다는 점이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된다. 이 때문에 영국 국방 고위 관료들은 호주가 실질적인 기술 기여 없이 영미권의 기술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려 한다며 오커스 합류 자격을 노골적으로 비난해 왔다. 핵심 제조 역량 측면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부담을 실질적으로 경감시키기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다. 다만 현시점 영국뿐 아니라 미국 역시 건조 역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미국 또한 자국 해군의 버지니아급 잠수함 건조 물량조차 소화하지 못해 허덕이는 실정이다.
결국 오커스의 외연 확장 시도는 서방의 제조업 붕괴를 일본의 제조 기술로 보완하려는 고육지책의 성격이 짙다. 한 군사안보 전문가는 "일본의 오커스 참여 여부는 향후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력 균형을 결정지을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이는 안보 동맹의 성격이 이념적 결속에서 제조 역량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짚었다. 서방의 가치 공유라는 명분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무기 생산 체계의 가동 여부가 안보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