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전후 평화 질서의 종언, 산업 경쟁이 국제 질서 바꾼다
[딥폴리시] 전후 평화 질서의 종언, 산업 경쟁이 국제 질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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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비 확대 속 공급망·첨단산업 중심 안보 재편 전기차·AI 둘러싼 美中 기술 패권 경쟁 격화 공급망 안정성과 산업 역량이 새 평화 질서 좌우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세계 군사비 지출액은 2조8,870억 달러(약 4,325조원)에 이르렀다. 이는 글로벌 안보 경쟁과 지정학적 긴장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격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다. 세계 경제는 평온한 전후 질서로 복귀하기보다 군사력 증강과 산업 경쟁이 동시에 확대되는 국면에 진입했다. 또한 각국은 교역을 유지하는 동시에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 시설, 전략 산업 육성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국가 간 교역과 경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전쟁으로 감수해야 할 경제적 피해 역시 커진다는 점에서, 교역 확대가 갈등을 억제할 수 있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한 시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특정 국가가 제조 기반과 핵심 공급망을 장악하고 다른 국가는 소비와 자본시장 역할에 머무는 구조에서는 이런 균형도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질서 역시 공급망 안정성과 전략 산업 경쟁력을 함께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흐름이다.
무역 상호 의존과 협상력 경쟁
상호 무역이 평화를 뒷받침한다는 논리의 핵심은 국가 간 의존을 통해 전쟁 비용을 높이는 데 있다. 교역과 투자, 공급망 연결이 깊어질수록 충돌 발생 시 감수해야 할 경제적 손실도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연구에서는 양국 간 교역 규모가 두 배 늘어날 경우 군사적 분쟁 가능성이 약 2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상호 무역 의존이 항상 평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거래하는지, 누가 핵심 부가가치를 확보하는지, 위기 상황에서 공급망 대체가 가능한지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저가 소비재나 일반 서비스 교역은 상호 이익 확대 효과가 크지만, 반도체와 희토류, 배터리, 전력 시스템처럼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안보 불안도 함께 커질 수 있다. 최근 확산되는 ‘디리스킹(de-risking)’ 역시 단순한 보호무역주의와는 다른 흐름으로 읽힌다. 이는 핵심 산업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춰 위기 상황에서도 협상력을 유지하려는 전략적 대응 성격이 강하다.

비대칭 교역과 공급망 주도권
이 같은 흐름은 미중 교역 구조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미국의 대중 교역 규모는 4,147억 달러(약 621조원)였지만, 이 가운데 수출은 1,063억 달러(약 159조원)에 그친 반면 수입은 3,084억 달러(약 462조원)에 달했다. 이는 한쪽은 제조 역량과 공급망을 장악하고, 다른 한쪽은 소비시장 역할에 집중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흐름이 이어질 경우 특정 국가가 가치사슬 상단과 산업 표준을 동시에 확보하면서 상대국 제조 기반은 점차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전기차 시장은 이러한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24년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1,700만 대를 넘어섰고, 이 가운데 1,100만 대 이상이 중국 시장에서 판매됐다. 중국은 글로벌 배터리 셀 생산의 약 80%, 양극재 생산의 약 85%를 차지하는 등 전기차 공급망 전반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상태다. 전기차가 미래 자동차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수록 배터리와 충전 인프라,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영향력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우려가 크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이 중국산 전기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AI 인프라 중심의 기술 패권 재편
전기차 분야에서 중국이 공급망 우위를 구축했다면, 미국은 인공지능(AI)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략 자산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도체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컴퓨팅 인프라를 포괄하는 AI 생태계는 현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기반으로 부상했다. 엔비디아가 기록한 지난해 1,305억 달러(약 196조원) 매출은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미국의 AI 확산 속도 역시 전력과 인프라 수요를 빠르게 확대시키고 있다. 2030년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약 945테라와트시(TWh)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일본 연간 전력 소비량에 근접한 수준이다. 이에 따라 AI 반도체와 클라우드 시스템, 전력망, 냉각 기술을 확보한 국가는 차세대 산업 운영 체계와 디지털 인프라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전략 산업 중심의 공급망 재편
최근에는 무제한 개방이나 전면적 디커플링(decoupling)보다 핵심 산업별 위험도를 구분해 관리하는 ‘선별적 상호 의존’ 전략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위험이 낮은 분야에서는 교역과 협력을 유지하되, 공급망 무기화 가능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생산 거점을 분산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과 제조 기반을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춰 위기 상황에서도 산업과 안보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전기차와 AI 산업에서는 공급망 회복력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AI 산업은 반도체 생산 능력에 더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데이터센터 운영 역량 확보까지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이 과정에서 산업 정책의 역할도 다시 커지는 분위기다. 주요국들은 세제 지원과 보조금, 조달 정책, 수출 규제 등을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과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산업 역량이 좌우하는 새로운 평화 질서
평화가 시장 논리만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국가 간 교역과 경제 연결은 신뢰와 공급망 다변화, 균형 잡힌 산업 역량 위에서 작동할 때 갈등 완화 효과가 담보된다. 반면 무역이 특정 국가의 지배력 확대 수단으로 활용될 경우 경제적 상호 의존은 새로운 긴장 요인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결국 앞으로의 국제 질서는 개방과 안보를 별개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국 산업 기반과 동맹 협력 체계를 함께 강화하는 국가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공급망 안정성과 핵심 기술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한 국가가 글로벌 협상력과 안보 주도권까지 함께 가져갈 것이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앞으로의 평화는 시장 개방 자체보다 핵심 산업과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국가 역량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Strategic Peace Dividend Is Built, Not Assumed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