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조원 투자하겠다" HBM4 주도권 잡고 질주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부담 커져
"110조원 투자하겠다" HBM4 주도권 잡고 질주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부담 커져
입력
수정
'HBM4 선두 주자' 삼성전자, 110조원 투자로 AI 반도체 승부수 엔비디아·AMD·오픈AI 고객사로 확보, 시장 영향력 대폭 확대 기존 HBM 강자 SK하이닉스, 기술 전략 재편 압박 가중

삼성전자가 연간 투자 규모를 사상 최초로 100조원 이상까지 확대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주도권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미 6세대 HBM(HBM4) 경쟁에서 선두 자리를 거머쥔 삼성전자가 관련 분야에 추가 투자를 단행할 경우, 핵심 경쟁사인 SK하이닉스가 받는 압박이 한층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삼성전자의 사상 최대 규모 투자
23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2026년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고 올해 시설 투자 및 연구개발(R&D)에 총 110조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90조4,000억원) 대비 21.7% 증가한 수준이자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중 대부분은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에 투자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향후 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선단 패키징을 모두 아우르는 ‘원스톱 솔루션’을 발판 삼아 AI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HBM 등 고부가 메모리 시장에서 초격차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특히 HBM 기술 고도화에 집중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삼성전자는 지난 수년간 관련 시장에서 좀처럼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최근 HBM4 경쟁에 불이 붙으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난 1월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HBM4 12단 제품 양산 출하를 시작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제품 성능을 앞세워 HBM4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삼성전자 HBM4에는 1c D램(10나노급 6세대) 최선단 공정이 활용됐고, 베이스 다이(HBM 가장 아래 놓인 기판)에는 성능과 전력 효율 측면에서 유리한 4㎚(나노미터) 공정이 적용됐다. 이에 삼성전자 프리미엄 HBM4의 동작 속도는 13Gbps(초당 기가비트)까지 치솟았다. 이는 국제 반도체 표준협의기구(JEDEC) 기준치(8Gbps)는 물론, 엔비디아의 요구 사항이었던 10~11Gbps도 대폭 웃도는 수치다.
당초 시장은 삼성전자의 이 같은 기술 승부수에 적잖은 우려를 나타냈다. 1c D램 공정의 저조한 수율이 HBM 양산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삼성전자가 꺼내 든 해결책이 1c D램의 설계 수정이다. 핵심 회로의 선폭은 유지하되, 주변부 회로의 선폭 기준을 일부 완화해 양산 난이도를 조절한 것이다. 주변부 회로의 구현이 용이해지면서 삼성전자의 1c D램 수율은 눈에 띄게 개선되기 시작했고, 칩 크기가 확대되며 HBM 제조에 필수적인 TSV(실리콘관통전극) 공정에서도 안정성이 확보됐다.
삼성전자 HBM4, 시장 수요 굳건
이 같은 기술력을 발판 삼아 삼성전자는 핵심 고객사인 엔비디아의 HBM4 공급망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최근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삼성전자에 극찬을 보내며 협력 구도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그는 16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GPU Technology Conference) 2026’ 현장에서 삼성전자 전시관을 방문해 “아주 훌륭한 파트너십”이라며 우호적 시선을 드러냈고, 기조연설에서도 차세대 언어처리장치(LPU) ‘그록 3’를 소개하며 “생산을 맡아준 삼성에 정말 고맙다”고 발언했다. 그록 3는 지난해 엔비디아가 인수한 추론용 AI 반도체 스타트업 그록의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엔비디아가 하반기 선보일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에 적용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베라 루빈에 탑재되는 HBM4의 공급사이기도 하다.
여타 주요 고객사 확보에도 속도가 붙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지난 18일 자사 평택 사업장에서 미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 AMD와 차세대 AI 메모리, 컴퓨팅 기술 분야 협력을 확대하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계약에 따라 삼성전자는 AMD의 AI 가속기인 '인스팅트 MI455X'에 HBM4를 공급한다. AI 데이터센터 랙 단위 플랫폼 헬리오스 및 6세대 EPYC 서버 중앙처리장치(CPU)의 성능 극대화를 위해 고성능 DDR5 메모리 솔루션 분야에서도 AMD와 손을 잡을 계획이다.
지난 21일에는 대만 IT 매체 디지타임스가 "삼성전자가 오픈AI 및 설계 파트너인 브로드컴의 까다로운 기술 검증을 통과하며 초대형 HBM4 수주에 성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첫 자사 AI 프로세서(내부 코드명 타이탄)의 맞춤형 실리콘을 확보하기 위해 브로드컴과 손을 잡은 오픈AI가 추가 파트너로 삼성전자를 낙점한 것이다. 올해 말부터 오픈AI의 데이터센터에 삼성전자의 12단 HBM4가 본격 탑재되면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의 수익성은 대폭 성장할 전망이다.

삼성전자 맹추격 속 SK하이닉스 대응책은
이처럼 삼성전자의 시장 영향력이 확대되자 SK하이닉스의 고심은 커지고 있다. 향후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경쟁력을 추가로 제고할 경우, SK하이닉스 중심으로 움직이던 AI 반도체 공급망에 지각변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존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독주하고 마이크론이 추격하는 구도로,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국면에 놓여 있었다. 압도적인 생산 능력을 보유한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시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일부분 해소되며 판도가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HBM4 시장 점유율 전망치는 SK하이닉스 54%, 삼성전자 28% 수준이다. SK하이닉스의 기존 점유율이 60% 이상이었고, 삼성전자가 20% 초반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4 최종 샘플을 엔비디아에 보낸 상태다. 이 샘플은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데이터 전송 속도를 충족하기 위해 지난해 4분기부터 일부 설계 수정과 최적화 작업을 거쳐 완성한 제품이다. 문제는 해당 제품의 성능이 삼성전자 HBM4 대비 부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가 HBM4 개발 과정에서 성숙한 5세대(1b) D램을 대만 TSMC의 12나노 공정으로 만든 베이스 다이와 결합하는 방식을 택한 탓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활용한 1c D램 및 4㎚ 대비 구형 공정이다.
HBM4 성능 경쟁에서 삼성전자에 선두를 내준 SK하이닉스는 7세대 HBM(HBM4E) 고도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HBM4E 코어 다이에 1c D램 공정을 활용하고, 로직 다이에는 TSMC의 3㎚ 공정을 적용하는 식이다. 당초 SK하이닉스는 고객 맞춤형 HBM에만 3㎚ 공정을 쓸 계획이었다. 3㎚ 공정은 성능 개선 폭이 큰 만큼 제품 원가가 높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HBM4 질주에 따라 SK하이닉스의 원가 및 기술 전략이 급변하기 시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