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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흔들리는 규칙, 재배치되는 질서

[딥폴리시] 흔들리는 규칙, 재배치되는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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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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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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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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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규범에서 선택적 합의로 이동하는 국제질서
군사·통상·제도 영역, 갈라지는 규칙 적용 단위
교육·연구까지 확산되는 질서 재편 비용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후 국제질서를 떠받쳐 온 규칙 기반 질서가 재편 국면에 들어섰다. 공통 규칙과 다자 협력을 축으로 작동해 온 기존 시스템은 더 이상 단일한 기준으로 유지되지 않고, 지역 단위의 선택적 합의와 제한적 협력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는 규칙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로벌 차원의 보편 규범이 약화되는 대신, 경제·안보·제도 영역별로 규칙이 적용되고 집행되는 단위가 달라지고 있다. 하나의 규칙이 전 세계를 포괄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사안과 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결속 장치가 병존하는 체제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현재의 변화는 질서의 해체라기보다, 규칙이 작동하는 공간과 방식이 재조정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체제 변화와 규범 신뢰의 약화

국제질서의 불안정성은 정치 체제 변화와 맞물리며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공통 규범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그 결과 규칙에 기반한 국제 협력 구조의 전제 자체를 흔들고 있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 EIU)에 따르면 2024년에는 정치적 권리와 시민 자유가 개선된 국가보다 악화된 국가가 더 많았으며, 전 세계 인구의 과반은 ‘부분적 자유’ 또는 ‘비자유’ 국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 체제와 가치 기준의 분화를 심화시키고, 국제 규범을 둘러싼 국가별 해석과 수용 방식의 차이를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국제 규칙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보편 기준이라기보다, 사안별 이해관계와 정치적 조건에 따라 재조정되는 대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협력 역시 상시적 규범 체계에서 점차 이탈해, 조건과 범위를 개별적으로 설정하는 협상 중심 구조로 옮겨가는 흐름을 보인다.

주: 세계 군사비 지출은 2020년을 기점으로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며, 규칙 기반 안정에서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안보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한다.

군사비 증가로 드러난 질서 이동

안보 환경의 변화는 이러한 질서 전환을 수치로 보여준다. 국가들은 국제 규범에 의존하기보다 자국 중심의 전략적 완충 능력을 우선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판단을 조정하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에 따르면 2024년 세계 군사비 지출은 전년 대비 크게 증가했으며, 이는 최근 수년 사이 가장 큰 증가폭으로 기록됐다.

군사비 확대는 단순한 국방 예산 증액을 넘어, 위험을 규칙과 제도보다 군사적 억지와 힘의 축적으로 관리하려는 선택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국제 질서는 규칙에 기반한 안정성에서 점차 이탈해, 힘의 균형과 대응 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역 통상 프레임의 부상

안보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국가는 경제 영역에서도 보편 규칙보다 작동 가능한 틀을 먼저 모색하게 된다. 글로벌 규칙의 공백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역 단위의 제도적 합의로 빠르게 메워지고 있다. 다자 질서의 구속력이 약화되면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 통상 프레임을 중심으로 협력 구조를 재정비해 왔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과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 체계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생산·무역 네트워크를 지탱하는 축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주요 지역 무역 블록은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 프레임은 관세, 원산지 규정, 공급망 관리와 같은 실무적 요소를 중심으로 설계돼 경제 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정치적 가치나 제도적 기준의 통합보다는 안정성과 효율을 우선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지역 통상 프레임은 보편 질서의 공백을 보완하는 동시에 성격이 분명한 대체 선택지로 기능하고 있다.

주: RCEP, 미·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유럽연합(EU) 등 주요 지역 통상 블록이 글로벌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통상 거버넌스의 중심이 보편 규칙에서 지역 프레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육·연구 영역의 제도 조정 부담

질서 재편의 영향은 통상과 안보를 넘어 교육과 연구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제 학술 교류와 연구 인력 이동은 공통 규칙, 제도적 신뢰, 상호 인정 체계를 전제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유네스코(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UNESCO)에 따르면 27개국은 학위 상호 인정 강화, 교육 사기 대응, 인공지능(AI)의 윤리적 활용을 중심으로 협력 체계를 재정비하고 있다. 이는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제도 불일치가 더 이상 부차적 문제가 아니라, 교류와 협력의 지속성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국경을 넘는 학위 인정과 연구 자격 검증이 지연되거나 불확실해질 경우, 인력 이동과 공동 연구는 구조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역시 지역 협력 확대와 함께 신뢰와 자원이 글로벌 규칙에서 지역 단위의 합의로 점진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육과 연구 제도는 보편 규범에 의존하기보다 지역별 기준과 절차에 맞춰 조정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있다. 교육을 단순한 교류 대상이 아닌 제도 인프라로 관리하지 않을 경우, 질서 전환의 비용은 단기간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누적될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Next Binding Frame: Rebuilding Order When the Rules-Based Order Fray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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