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안보와 성장 사이, 유럽이 선택해야 할 재정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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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확대 속 연구·인재 투자 밀려, 성장 기반 흔들림 경고 조달 중심 재정 한계 드러나, 혁신 연계 국방 전환 필요성 부각 공동 조달·개방형 구조 확산, 비용 절감·성장 동력 동시 확보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이 안보를 강화하면서도 경제 성장의 흐름을 지켜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방 지출은 빠르게 늘었고, 그만큼 재정 운용의 여지는 좁아졌다. 이 과정에서 국방 확대가 교육·연구·인프라와 같은 성장 기반 지출을 밀어내는 구조로 고착될 경우, 장기 성장과 사회 안정 모두에 부담이 누적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판단의 기준은 지출의 총량이 아니다. 국방 자금이 어떤 영역으로 배분되는지가 향후 성장 경로를 좌우한다. 유럽연합(EU)은 안보 강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연구개발(R&D)과 인재 투자가 약화되지 않도록 재정 운용과 전략의 방향을 다시 정렬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국방 지출, 성장 기반 압박
유럽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국방 지출 확대가 다른 핵심 지출을 잠식하는 흐름이다. 전시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방비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30%에 이르며, 그 결과 교육·연구·인프라·사회복지 지출이 크게 제약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재정이 한 방향으로 쏠릴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U는 전시 체제에 놓여 있지는 않지만, 재정에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EU의 국방 지출은 2025년 GDP의 2%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금액으로는 3,810억 유로(약 556조원)에 이르며, 이 증가 흐름의 중심에는 독일이 있다.
논의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일부 정책권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방위를 위해 GDP의 3% 이상을 국방에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문제는 규모보다 속도다. 국방비가 빠르게 늘어날 경우, 한정된 재정 안에서 조정 대상이 되는 항목은 대체로 R&D와 인재 투자로 향한다. 성장의 토대가 뒤로 밀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이 흐름이 고착되면 선택지는 더욱 좁아진다. 국방을 강화할수록 성장 여력은 약해지고, 성장이 둔화될수록 국방 비용의 부담은 다시 커지는 구조가 형성된다. 유럽이 직면한 과제는 지출을 늘릴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성장 기반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국방을 강화할 수 있는 경로를 찾는 데 있다.

주: EU의 국방 지출은 2019년 이후 GDP 대비 1.4%에서 2025년 2.1% 수준까지 꾸준히 확대된 반면,
R&D 집약도는 같은 기간 2.1%대 초반에서 2.3% 안팎에 머물렀다.
조달 편중이 키우는 비효율
이 위험은 현재의 재정 규칙에서 더욱 증폭된다. EU의 재정 운용은 국방 지출에는 비교적 유연하게 적용되는 반면, R&D와 인프라 같은 다른 공공투자에는 엄격하게 작동한다. 그 결과 제한된 재원이 R&D가 아닌 무기 조달로 빠르게 쏠리는 흐름이 형성됐다. 재정 규칙이 지출의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다.
문제는 현대 국방 역량의 성격이다. 오늘날 방위 능력은 전차나 함정 같은 장비 숫자보다 소프트웨어, 자동화, 데이터, 첨단 컴퓨팅에 더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들 영역은 정부 예산에서 상대적으로 조정이 쉬운 항목으로 분류돼 왔다. 눈에 보이는 장비는 남고, 보이지 않는 기술 투자는 줄어드는 구조가 반복됐다.
하드웨어 중심 투자는 단기적으로 전력 규모를 키울 수 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유지비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기술 갱신 속도는 느려진다. 그 결과 국방 비용의 총량은 확대되고, 이를 뒷받침할 경제 성장 여력은 약해진다. 조달 비중이 높아질수록 비용 구조가 경직되는 이유다.
국방과 혁신을 분리해 보는 관점 자체는 이 비효율을 고착시킨다. 실제 역량을 키우는 지출과 단순히 장비를 늘리는 지출을 같은 기준으로 다루는 한, 재정의 효율은 개선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재정 규칙은 국방 지출의 성격을 구분하고, 어떤 투자가 장기 역량과 생산성으로 이어지는지에 맞춰 다시 정렬될 필요가 있다.
재정 압박 속 투자 선택
이 문제의 출발점은 유럽이 처한 재정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다수의 EU 회원국은 2020년대 초반부터 높은 국가부채와 재정 적자를 안은 채 정책 운용에 나섰다. 여기에 고령화가 겹치며 연금과 의료 지출이 빠르게 늘고 있고, 기후·에너지 전환을 위한 장기간의 대규모 자본 투입도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재정의 선택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정부가 가장 먼저 조정하는 항목은 공공투자와 R&D이다. 단기적으로 재정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장기 성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생산성을 높이고 세수 기반을 확장하는 역할 역시 결국 공공투자와 연구에 달려 있다. 재정 압박이 커질수록 성장 동력을 먼저 줄이는 역설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수치는 이러한 흐름을 분명히 보여준다. EU의 국방 지출은 10년 연속 증가해 2024년 GDP의 약 1.9%에 도달했다. 반면 같은 해 EU 전체 R&D 지출은 약 4,030억 유로(약 590조원)로, GDP 대비 2.24% 수준에 머물렀다. 국방 지출이 빠르게 늘어나는 동안 혁신 투자의 확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국방과 R&D는 모두 필수적인 지출이다. 다만 현재의 재정 규칙은 국방에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반면, 혁신 투자에는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 생산성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지출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투자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국방 강화는 재정 부담만 키운 채 성장 둔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재정 압박 속에서 필요한 것은 지출 총액의 단순한 조정이 아니라, 어떤 투자가 미래의 부담을 줄이는지를 가려내는 선택이다.

주: 국가별·폐쇄형 조달 방식은 조달·운영·업그레이드 비용이 누적되며 역량 단위당 총생애주기 비용이 250 수준까지 높아진다.
반면 공동·개방형 조달은 중복 비용을 줄이고 제공 역량을 확대해 역량 단위당 비용을 약 158 수준으로 낮춘다.
더 잘 쓰는 국방 전략
해법은 지출의 질을 바꾸는 데 있다. 유럽은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국방 비용을 낮출 여지가 충분하다. 공동 조달은 중복을 줄이고 수요를 안정시키며, 산업 전반의 학습 속도를 끌어올린다. 주문이 커지고 예측 가능해질수록 기업은 공정 개선과 비용 절감에 투자할 수 있다.
여기에 개방형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 장비·소프트웨어의 인터페이스를 공개 표준으로 설계해 다양한 기술을 쉽게 연결·교체할 수 있는 구조)와 상호운용 표준이 더해지면 효과는 커진다. 표준화는 개발과 유지 비용을 낮추고, 체계 업그레이드를 빠르게 만든다. 특히 조달 예산의 일부를 센서, 자동화, 보안 통신 같은 이중 용도 R&D로 돌릴 경우, 국방 지출의 파급 효과는 군 내부에 머물지 않는다. 기술은 민간 산업으로 확산되고,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진다.
전장은 이미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드론과 소프트웨어 기반 체계를 빠르게 개선하며 활용한 사례는, 장비 숫자보다 기술의 반복 개선이 성과를 좌우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맞춤형 플랫폼을 늘리는 방식보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역량에 투자할 때 비용 대비 성과가 더 커진다.
국방 지출을 혁신과 함께 설계할 경우 선택지는 넓어진다. EU는 GDP의 2.5~3.0% 수준에서 방위비를 유지하면서도, R&D 비중을 2.7~3.0%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는 한국의 R&D 투자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안보와 성장을 동시에 지키는 현실적인 경로다. 더 많이 쓰는 전략보다, 더 잘 쓰는 전략이 지속 가능성을 만든다.
안보·성장의 동시 해법
유럽의 과제는 분명하다. 국방을 강화하면서도 R&D와 인재라는 성장의 핵심 축을 지켜내는 일이다. 우크라이나가 국방에 GDP의 약 30%를 쓰는 현실은 목표가 아닌 경고로 읽혀야 한다. 평시의 유럽이 그 수준에 접근하는 순간, 재정과 사회 시스템에 가해지는 부담은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해답은 방향에 있다. 재정 유연성은 혁신으로 이어지는 지출에 한해 적용하고, 그 성과는 수치와 결과로 점검해야 한다. 공동 조달을 통해 중복 비용을 줄이고, 개방형 표준을 확산시켜 유지비와 업그레이드 비용을 낮추는 선택도 필요하다. 지출을 늘리는 판단보다, 지출이 실제 역량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설계가 중요해진다.
안보를 이유로 성장을 뒤로 미루는 선택은 결국 더 큰 비용으로 돌아온다. 반대로 국방을 혁신의 촉매로 활용할 수 있다면, 방위 역량과 경제 활력은 함께 강화될 수 있다. 유럽이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은 단기 대응이 아니라, 안보와 성장을 동시에 지속시키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 faces a choice: ensuring security without hindering economic progres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