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크레디트스위스 구제, 시장 안정과 원칙 훼손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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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디트스위스 구제, 금융시장 안정에 성공 손실 부담 원칙 흔들리며 시장 규율 약화 스위스만 가능했던 예외적 위기 대응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3년 3월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스위스 당국은 주말 동안 최대 1,090억 스위스프랑(약 194조원) 규모의 구제금융 체계를 마련했다. UBS의 인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대비한 90억 스위스프랑(약 16조원) 규모의 정부 보증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 보증은 실제 사용되지 않았고, UBS는 2023년 8월 보증을 반납해 정부의 재정 지원도 종료됐다. 위기 수습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손실 부담 원칙은 예외를 맞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받아들이는 위기 대응의 기준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남겼다.
엇갈린 손실 부담
스위스의 위기 대응은 유동성 지원과 손실 보증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됐다. 스위스국립은행(SNB)이 크레디트스위스에 공급하는 최대 1,000억 스위스프랑(약 178조원)의 긴급 유동성에는 국가보증을 제공했고 UBS가 인수한 자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은 90억 스위스프랑(약 16조원) 한도에서 정부가 보전하기로 했다.
UBS는 크레디트스위스를 불과 일주일 전 시장 평가가치의 일부에 불과한 30억 스위스프랑(약 5조원)에 넘겨받았다. 이 과정에서 크레디트스위스가 발행한 약 160억 스위스프랑(약 28조원) 규모의 기타기본자본(AT1) 채권은 전액 상각됐다. 반면 AT1보다 변제 순위가 높은 베일인(bail-in·채권자 손실부담) 채권에는 손실이 부과되지 않았다. 베일인 채권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 부실이 발생하면 채권자도 손실을 분담하도록 도입된 금융상품이다. 합병 직전까지 투자자들은 두 종류의 채권 모두 손실 가능성을 반영해 거래했다. 그러나 실제 정리 과정에서는 AT1 채권만 전액 상각됐고 베일인 채권 가격은 곧바로 반등세로 돌아섰다.
위기 수습 이후의 전개도 이례적이었다. 1,000억 스위스프랑(약 178조원) 규모의 유동성 지원은 실제 집행됐지만 크레디트스위스는 2023년 5월 말까지 담보대출을 모두 상환했다. 90억 스위스프랑약 16조원) 규모의 손실보증도 단 한 차례도 사용되지 않은 채 5개월 만에 종료됐다. 대규모 공적 보증이 실제 재정 지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번 구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스위스 정부가 우선한 것은 은행의 지급여력 보강보다 금융시장과 자국 금융산업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손실 부담 역시 채권의 변제 순위에 따라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았다. 주주들은 의결권도 행사하지 못한 채 헐값에 지분을 넘기며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고, AT1 채권 보유자도 투자금을 모두 잃었다. 반면 선순위 채권자와 예금자는 물론 은행 부실 시 손실을 분담하도록 설계된 베일인 채권 보유자도 손실을 피했다. 손실 부담은 특정 단계에서 멈췄고 기존 베일인 원칙도 예외가 됐다. 이는 위기 대응 과정에서 정해진 손실 부담 순서보다 신속한 인수와 금융시장 안정을 우선한 결과였다.

방코포풀라르와 다른 선택
스위스와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수습한 사례도 있다. 2017년 스페인의 방코포풀라르(Banco Popular) 매각이다. 당시 스페인 금융당국은 부실화된 방코포풀라르를 산탄데르은행에 매각했고, 베일인 대상 채권자는 원칙에 따라 손실을 부담했다. 그러나 매각 절차는 한 주말 만에 마무리됐고, 금융시장도 큰 혼란 없이 안정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국가 보증은 동원되지 않았다.
크레디트스위스가 방코포풀라르보다 훨씬 큰 규모에 복잡한 사업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례의 결정적 차이는 은행의 규모보다 어떤 채권자에게 손실을 부담시킬 것인지에 대한 정책 판단이었다. 방코포풀라르는 베일인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금융시장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스위스는 일부 채권자를 보호하는 대신 시장 신뢰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같은 차이는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에 서로 다른 신호를 남겼다. 방코포풀라르 사례는 위기 상황에서도 기존 정리 원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지만, 크레디트스위스 사례는 필요할 경우 당국이 기존 원칙보다 시장 안정을 우선할 수 있다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금융 브랜드 보호가 초래한 UBS의 거대화
스위스가 이러한 선택을 한 배경에는 자국 금융산업의 특수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경제지표만 보면 스위스 은행산업의 규모는 크지 않다. 금융권 종사자는 약 10만 명 수준이며 국내총생산(GDP) 기여도도 5%를 밑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만으로 스위스 금융의 가치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전 세계 자산가들이 막대한 자산을 맡기는 이유는 스위스 은행이 오랜 기간 쌓아온 안정성과 감독 체계, 금융 비밀 유지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크레디트스위스 위기 당시 스위스 정부가 가장 우려한 것도 단순한 재정 부담이 아니었다. 대형 은행에 원칙대로 베일인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시장 불안이 확산되면 '스위스 은행도 다른 나라와 다르지 않다'라는 인식이 퍼질 가능성을 더 크게 경계했다. 이에 따라 스위스는 크레디트스위스를 최대 경쟁사인 UBS에 넘기는 한편 명목상 규모는 크지만 실제 재정 부담은 제한적인 공적 보증을 내걸었다. 위기관리 원칙 일부를 유예하면서까지 금융 브랜드를 지키는 데 정책의 무게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새로운 부담도 남겼다. 크레디트스위스를 흡수한 UBS는 이제 단일 금융기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초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2025년 스위스 금융안정성 평가에 따르면 UBS의 총자산은 스위스 GDP의 약 167%에 달한다. 앞으로 UBS가 다시 위기에 빠질 경우 크레디트스위스 때처럼 인수를 맡을 국내 금융기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스위스 당국이 위기 이후 UBS에 한층 강화된 자본 규제를 추진하고 UBS가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23년 3월의 구제 조치는 단기적으로 금융시장을 안정시켰지만, 장기적으로는 스위스 금융시스템이 단일 초대형 은행에 더욱 의존하는 구조를 남겼다.

시장 규율의 약화와 글로벌 연쇄 반응
크레디트스위스 구제는 스위스에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아니었다. 금융시장은 당국의 설명보다 실제 행동을 기준으로 미래의 위기 대응 방식을 예측한다. 크레디트스위스 합병이 타결되자 투자자들은 글로벌 은행들이 발행한 베일인 채권의 위험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베일인 채권의 스프레드는 약 6% 하락했고 손실을 전액 부담한 AT1 채권의 스프레드는 크게 벌어졌다. 유로존과 영국의 베일인 채권 스프레드도 각각 13~14%가량 축소됐다. 반면 국제결제은행(BIS) 보고서에 따르면 선순위 채권 스프레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 같은 가격 변화는 시장이 대형 은행이 위기에 처하면 당국이 법적 원칙을 넘어 광범위한 구제에 나설 가능성을 높게 보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손실 부담 순서를 엄격하게 적용하기보다 베일인 채권자를 포함한 상위 채권자를 보호할 것이라는 기대가 시장에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역설적으로 재무 상태가 취약한 은행에 더 큰 혜택으로 돌아갔다. 원칙대로라면 손실 부담 가능성이 큰 은행일수록 높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지만, 구제 기대가 커지면서 오히려 조달 비용이 더 큰 폭으로 낮아졌다. 은행의 실적 발표가 베일인 채권 가격에 미치는 영향도 구제 이전보다 약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투자자들이 개별 은행의 재무 건전성보다 위기 발생 시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를 더 중요한 변수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크레디트스위스 구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구축된 시장 규율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남겼다. '손실은 납세자가 아니라 주주와 채권자가 부담한다'라는 베일인 원칙의 신뢰가 약해졌고, 미국 대형 은행을 중심으로 점차 축소되던 암묵적 정부 지원 기대도 다시 커졌다. 스위스의 결정은 한 국가의 위기 대응을 넘어 글로벌 은행채 시장의 위험 평가 기준 자체를 바꿔 놓았다.
스위스식 구제의 전제조건
스위스의 위기 대응은 소규모 개방경제와 막대한 재정 여력, 경제 규모를 뛰어넘는 금융산업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금융업의 직접적인 경제 기여도는 크지 않지만 국가 신뢰를 떠받치는 핵심 산업을 위해 GDP를 웃도는 규모의 공적 보증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흔치 않다. 싱가포르나 리히텐슈타인처럼 경제 규모에 비해 프라이빗 뱅킹 등 금융산업의 비중과 국제적 신뢰가 절대적인 금융중심지에서는 스위스식 구제가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금융 신뢰가 훼손될 경우 발생하는 국익 손실이 정부 보증에 따른 재정 부담보다 훨씬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부분의 국가는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산업이 다변화되고 내수 기반이 큰 경제에서는 특정 은행의 존속이 곧 국가 신뢰와 직결되지 않는다. 이런 국가가 초대형 은행의 손실까지 보증하면 얻을 수 있는 편익보다 재정 부담이 훨씬 커질 가능성이 높다. 스위스 사례를 모든 금융위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모델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스위스가 끝내 집행하지 않은 공적 보증은 단기적으로는 비용 부담이 거의 없는 효율적인 대응처럼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위기가 단기간에 수습됐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금융 신뢰와 재정 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국가가 같은 방식을 선택하면 시장의 구제 기대만 높인 채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크레디트스위스 구제는 스위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가능했던 예외적 선택으로 봐야 한다. 위기관리의 핵심은 공적 보증의 규모가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의 신뢰와 재정 역량, 그리고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을 함께 갖추는 데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Guarantee Switzerland Never Had to Cash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