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위기가 바꾼 유로존 재정, 공동 차입 시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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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위기가 바꾼 EU 재정통합 RRF로 공동 차입·공동 투자 시대 개막 지속 가능한 공동 재정체계 구축이 핵심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로존 부채위기는 공동 재정 없이 운영되는 통화동맹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은 국가별 재정 여력의 차이가 동일한 충격을 회원국 간 장기적인 경제 격차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같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은 공동 차입을 기반으로 한 회복·복원력기금(RRF)을 출범시켰다. RRF는 2018년 가격 기준 최대 6,725억 유로(약 1,118조원) 규모를 갖췄다. 이 가운데 3,125억 유로(약 520조원)는 보조금, 3,600억 유로(약 599조원)는 대출로 구성됐으며, 재원은 EU 공동 차입을 통해 조달했다. 기존 구제금융이 위기국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RRF는 회원국별 투자와 개혁 계획의 이행 성과에 따라 자금을 지원하는 첫 대규모 공동 재정수단으로 설계됐다.
공동 재정 없는 통화동맹
유로화 출범과 함께 통화정책은 유럽 차원의 단일 체계로 전환됐다. 반면 조세와 재정지출, 국가부채 관리 등 재정정책은 회원국 권한으로 남겨뒀다. 이는 통화 통합은 추진하되 재정 주권은 유지하려는 정치적 절충의 결과였다. 회원국들은 단일 중앙은행 설립과 재정적자 규율, 중앙은행의 정부 직접 재정지원 금지에는 뜻을 모았다. 그러나 과세와 차입, 재정지출 권한을 가진 연방 재무부 창설에는 끝내 뜻을 모으지 못했다.
물론 공동 재정 장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EU 공동예산은 공동 사업을 지원했고 결속정책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국가와 지역에 재정을 배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장기 성장과 지역 간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이었다. 경기침체기에 회원국을 신속하게 지원하거나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재정준칙 역시 공동 재정을 통한 경기 부양보다 회원국의 재정 건전성을 관리하는 데 무게를 뒀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뚜렷하게 드러났다. 각국 정부가 금융기관의 부채를 보증하거나 자본을 확충하면서 은행의 손실은 국가 재정 악화로 이어졌다. 이후 국채 가격이 하락하자 자국 국채를 대규모로 보유한 은행의 건전성도 다시 악화됐다. 은행과 정부의 위험이 서로 증폭되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를 공동으로 대응할 재정수단이 없었다는 점이다. 시장 불안에 직면한 국가는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거나 독자적으로 금리를 조정할 수 없었고, 세수가 감소해도 연방 차원의 재정 이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유로화는 역내 환율 위험은 제거했지만 국가부도 위험까지 없애지는 못했으며, 이를 공동으로 흡수할 제도적 기반도 갖춰지지 않았다.

위기 대응에 머문 구제금융
2010년 출범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는 회원국들의 지급보증을 바탕으로 채권을 발행해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그리스 등에 대출을 제공했다. 이어 2012년에는 상설기구인 유럽안정메커니즘(ESM)이 출범해 자본시장 접근이 어려운 회원국에 금융지원을 맡았다. EFSF와 ESM이 집행한 지원 규모는 모두 2,950억 유로(약 490조원)에 이르렀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증권시장프로그램(SMP)과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한 국채매입프로그램(OMT)을 통해 금융시장 안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금융시장 기능을 회복하고 국가부도 위험을 낮추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원은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이후에야 이뤄졌고 대부분 보조금이 아닌 대출 형태였다. 지원 대상 국가는 재정 건전성 회복과 구조개혁을 이행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조정 부담도 상당 부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당시 구제금융 체계는 국가부도를 막고 유로존을 방어하는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회원국 간 투자 여력을 보완하거나 공동 경기회복을 뒷받침하는 재정수단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팬데믹이 촉발한 공동 재정
코로나19 팬데믹은 EU 재정통합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모든 회원국이 동시에 외부 충격에 직면했지만 국가마다 재정 여력과 산업구조가 달라 대응 능력에는 큰 차이가 나타났다. 재정 여력이 충분한 국가는 기업과 고용, 공공투자를 적극 지원한 반면 고부채 국가는 대응 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러한 격차는 단일시장 전체의 회복을 늦추고 회원국 간 성장 격차를 확대할 가능성을 키웠다.
이에 EU는 2020년 7월 넥스트제너레이션EU(NGEU)를 출범시키며 개별 국가의 재정 여력이 역내 공동 회복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공동 차입으로 조성한 재원 가운데 핵심 사업인 RRF에는 6,725억 유로(약 1,118조원)가 배정됐다. 보조금과 대출은 인구와 소득 수준, 실업률, 코로나19 피해 규모 등을 반영해 배분했다. 지원 방식도 이전과 달랐다. 기존 구제금융이 재정위기를 겪는 국가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대출이었다면 RRF는 회원국이 제출한 회복·복원력계획에 담긴 투자와 개혁 과제를 이행한 뒤 성과에 따라 자금을 지급하는 구조였다. 공동 재정이 위기 대응을 넘어 공동 투자와 성장 전략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확대되면서 EU 재정통합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지속 가능한 재정통합의 조건
RRF는 EU 재정통합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완성된 재정동맹은 아니다. 2026년 종료를 전제로 한 한시적 제도인 만큼 이를 대체할 지속 가능한 공동 재정체계를 마련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우선 안정적인 상환 재원 확보가 필수적이다. 공동 차입으로 조달한 보조금 재원은 2058년까지 EU 예산으로 상환해야 한다. 이에 따라 회원국 간 분담금 갈등을 줄이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려면 안정적인 자체 재원 구축이 필요하다.
공동 재정의 적용 범위 역시 명확히 구체화할 시점이다. 전력망 연결과 공동 방위, 기후변화 대응, 핵심 연구개발(R&D)처럼 회원국을 넘어 파급효과가 큰 유럽 공공재는 공동 투자의 필요성이 크다. 반면 공동 재정이 일반적인 재정지출까지 상시 지원할 경우 회원국의 재정 규율이 약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앞으로의 공동 재정은 평상시 회원국의 재정 건전성 원칙을 유지하면서 유럽 공공재 투자와 대규모 위기 대응에 한해 작동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유로존의 재정정책은 2010년 국가 지급보증 기반의 대출인 EFSF에서 출발해 2021년 공동 차입을 바탕으로 투자와 개혁을 지원하는 RRF로 발전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공동 재정을 예외적 위기와 유럽 공공재에 한정하면서 책임성과 재정 규율을 함께 확보하는 일이다. 유로존 재정통합의 다음 단계는 제한적이지만 예측 가능한 공동 재정 역량을 제도화하는 데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From Bailouts to the RRF - Fiscal Evolution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