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China] 중국산 장비 의존 구조 흔드는 EU, 통신·에너지·보안 인프라 전면 차단 조짐
[EU-China] 중국산 장비 의존 구조 흔드는 EU, 통신·에너지·보안 인프라 전면 차단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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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시장 규칙 훼손 이유로 장비 퇴출 추진
중국, “이중잣대” 논리로 정당성 흠집내기
갈등 관리 방식에 차이, 우회 전략 움직임도

유럽연합(EU)이 중국을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위험 요인으로 규정하며 정책 기조 전환을 시사했다. 에너지·보안 인프라 전반에서 중국산 장비를 배제하는 방안을 통해 기존 권고 수준의 조치를 법적 의무로 격상한다는 구상이다. 중국이 미국 등 주요국과의 이중잣대를 주장하며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EU 내부에서도 비용 부담과 회원국 간 이해차가 변수로 떠올랐다. 국제사회는 EU가 여타 국가들과 갈등을 관리해 온 방식과 중국이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협력 파트너’에서 ‘시장 교란자’로
19일(이하 현지시각) 독일 도이체벨레(DW) 등 현지 유력 매체에 따르면 최근 EU 집행위원회는 중국산 장비 공급업체를 회원국 핵심 기반 시설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동안 권고 수준에 머물렀던 고위험 공급업체 제한 조치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의무 사항으로 격상해 화웨이, ZTE 같은 중국 기업이 유럽의 신경망에 접근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는 복안이다. 중국이 통신망과 태양광 시스템, 공항 및 항만의 보안 스캐너 등 장비를 통해 민감한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유사시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이번 조치는 전 산업을 대상으로 한 EU 차원의 정책 방향 전환으로 읽힌다. 실제 EU 집행위는 사이버 보안법(Cybersecurity Act) 개정을 통해 고위험 공급업체 개념을 명확히 하고, 회원국이 이를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2020년 5G 보안 가이드라인을 통해 화웨이를 고위험 업체로 분류하고도 강제력이 없어 회원국별로 대응이 엇갈렸던 상황과 대비된다. 당시 스웨덴은 즉각 중국산 통신 장비를 배제한 반면, 스페인과 그리스 등은 계속해서 화웨이 장비를 채택하며 가이드라인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낳은 바 있다.
EU의 시각 변화는 최근 몇 년간 누적된 통상·산업 갈등과도 맞물린다. 지난해 EU는 중국이 자국 의료기기 조달 시장에서 현지 기업을 차별했다며 국제조달규정(IPI)에 따른 조사를 개시한 바 있다. 과거 EU가 중국을 압박할 때 공공조달 시장이라는 제한된 수단을 활용했다면, 이제는 안보를 근거로 통신·에너지 등 민간 핵심 인프라 전반까지 규제 대상을 넓힌 셈이다. 이를 두고 미국 싱크탱크 아틀란틱카운슬은 “EU가 대중국 정책의 중심을 ‘관여’에서 ‘디리스킹’으로 이동시켰다”며 “중국의 국가 주도 산업 정책과 보조금 구조가 유럽 시장 질서를 왜곡한다는 인식이 정책 전환의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유럽 내부에선 이미 정치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최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디지털 주권 관련 행사에서 기술 자립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DW도 전문가 발언을 인용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클라우드 컴퓨팅 등 미래 산업에서 유럽이 미·중에 동시 의존하는 구조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이는 ‘차이나 리스크’를 시장 규칙과 전략적 자율성의 문제로 격상시킨 EU의 인식을 반영한다.
다만 비용 부담은 현실적인 쟁점으로 남는다. 화웨이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노키아와 에릭슨 등 유럽산 장비는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높아 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운다. 글로벌 통신 업계에서는 화웨이가 경쟁사 최대 40% 낮은 가격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왔다고 본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GSMA) 역시 중국산 장비를 배제할 경우 유럽의 5G 구축 비용이 550억 유로(약 94조원)가량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인프라 결정권을 EU 집행위로 이양하는 데 대한 회원국들의 거부감과 사업자들의 반발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중국은 미국-EU 분열 카드 활용 시도
EU의 중국산 장비 배제 움직임이 공개되자, 중국은 즉각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 외교 당국은 이번 조치가 “기술·안보 문제를 벗어난 정치적 선택에 가깝다”면서 EU가 중국에는 배타적 기준을 적용하면서 미국에는 예외를 두고 있다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중국을 차단하면서 미국을 받드는 이중잣대”라는 표현을 거듭하며 “이는 지금까지 EU가 표방해 온 시장 원칙과 법치 기준을 훼손하는 행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중국의 반응은 EU의 정책 정당성을 위협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도 논평에서 “EU는 중국 기업의 인프라 참여를 강제로 분리하면서도 미국이 관세와 영토 문제로 압박할 때는 침묵하거나 묵인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EU의 행보는 강대국의 패권 강압 앞에서 전략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결과라는 비판이다. 해당 매체는 EU가 통신 네트워크에서 전 산업으로 규제 범위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명확한 기술적·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구체적인 검증 절차도 거치지 않고 특정 국가와 기업을 배제하는 것은 시장 질서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비용과 현실성 문제도 중국 측의 공격 대상이다. 글로벌타임스는 유럽 전역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가운데 90% 이상이 중국에서 생산됐다는 점을 언급하며 “중국산 장비를 일괄 배제할 경우, 막대한 교체 비용과 공급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꼬집었다. 중국 공급업체의 강제 퇴출은 인프라 구축 지연으로 이어져 종국에는 소비자 요금 인상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는 EU 내부에서도 제기된 비용 부담 우려를 인용해 중국의 주장이 일방적 이해관계 방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또 다른 축은 미국과의 관계를 겨냥한 공세다.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부과를 무기 삼아 덴마크령 그린란드 문제를 압박한 사례를 거론하며 “EU가 미국의 영토·관세 압박에는 유화적으로 대응하면서 중국에는 안보를 명분으로 강경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의 이해에 편승한 결과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모습이다. 아울러 EU가 자국을 배제할수록 미국 의존도는 오히려 심화할 것이라는 가설을 강화해 장기적으로는 EU의 선택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비판 아닌 비난, 뒤에선 각개 접촉?
그간 EU가 미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과 갈등을 빚을 때의 양상을 보면, 분쟁은 대체로 법·제도·규칙의 틀 안에서 관리돼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12월 EU가 일론 머스크가 소유한 소셜미디어 플랫폼 X(옛 트위터)에 부과한 과징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EU는 X의 유료 인증 마크 ‘블루체크’가 이용자를 기만했다며 디지털서비스법(DSA)에 따라 1억2,000만 유로(약 2,07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과거 공인·기관 인증 수단이던 블루체크를 월 8달러에 판매하면서 사기와 조작에 노출시켰다는 게 EU 측 판단이다.
머스크 X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이라고 반발하며 EU를 향해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JD 밴스 미국 부통령과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등 유력 인사들마저 “미국 기술 플랫폼에 대한 외국 정부의 공격”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EU 집행위는 “표적 규제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미국 기업을 상대로 한 제재는 맞지만, 특정 기업이나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법률 적용에 그 목적이 있다는 설명이다. 표현의 자유와 플랫폼 규제라는 가치 충돌이 갈등으로 이어지는 국면에서도 양국은 법 집행과 반론 제기라는 제도적 경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은 외교 당국을 비롯해 다수의 관영·민영 매체까지 일제히 EU의 행보를 문제 삼으면서 그 양상이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이중잣대 프레임을 전면에 내세워 정책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그 이면에서 EU 개별 회원국을 상대로 맞춤형 접근을 전개하고 나섰다. 프랑스에는 에어버스 항공기 148대 규모의 신규 주문을 제시했고, 아일랜드에는 광우병 문제로 중단됐던 소고기 수입을 재개했다. 스페인에는 돼지고기 수입 재개를, 체코에는 무비자 입국 논의와 직항편 재개를 꺼내 들었다.
EU 집행위가 중국과의 갈등이 장기화에 접어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접근이 회원국 간 이해관계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분산되고 있다는 우려에서다. 실제 EU는 이번 사안과 별개로 중국산 풍력 터빈과 철도 차량에 대한 보조금 조사를 준비 중인데, 여기에는 중국의 과잉 생산과 저가 공세가 유럽 제조업에 막대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국가가 단기적 경제 이익을 이유로 별도 거래에 나설 경우, 외국 보조금 규제나 인프라 보안 정책 같은 EU 차원의 공동 대응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