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방어주는 옛말" 쌓여만 가는 글로벌 주류 재고, 취하지 않는 청년들
"경기방어주는 옛말" 쌓여만 가는 글로벌 주류 재고, 취하지 않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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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만 가는 글로벌 주류 기업 재고, 코로나19 당시 생산 확대 '부메랑' 소비 트렌드 변화로 전통적 경기방어주로서의 기능 휘발돼 무알코올 주류로 이동하는 수요, 관련 시장 재편 가속화

글로벌 주류 회사들이 재고 소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급증한 주류 수요에 맞춰 생산량을 대폭 늘렸던 업체들이 소비 트렌드 변화로 인해 역풍을 맞은 것이다. 시장에서는 최근 글로벌 주류 시장이 경기 침체와 젊은층의 무알코올 주류 선호 풍조 속에서 본격적인 구조 변화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이 나온다.
글로벌 주류업계 재고 '비상'
18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스카치위스키, 위스키, 코냑, 데킬라에 대한 수요가 역대급으로 급감하면서 주류 회사들의 증류주 재고가 엄청나게 쌓이고 있다"며 "이들은 증류소를 일시 폐쇄하고, 창고에 쌓여가는 병들을 처분하기 위해 가격을 인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실제 각 기업의 재무보고서에 따르면 디아지오, 페르노리카르, 캄파리, 브라운포먼, 레미 코앵트로 등 상장된 세계 최대 주류 기업 5곳이 보유한 숙성 주류 재고는 총 220억 달러(약 32조원) 규모다. 이는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히 프랑스 전통 코냑 명가인 레미의 숙성 재고는 18억 유로(약 3조원)로 연간 매출의 약 두 배에 달하며, 시가총액에도 근접한 규모다. 지난해 3월 기준 레미의 연간 매출은 8억8,460만 유로(약 1조5,000억원)였다. '조니워커' 시리즈로 유명한 디아지오 역시 연간 매출 대비 숙성 재고 비중이 2022 회계연도 34%에서 지난해 43%로 급증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번스타인의 애널리스트 트레버 스털링은 "이 같은 재고 누적은 전례 없는 수준"이라며 "현재 업체들의 재고량은 금융위기 이후 쌓였던 수준을 훨씬 웃돈다"고 설명했다.
주류 회사들의 재고가 쌓이기 시작한 핵심 원인으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음주 열풍이 지목된다. 당시 시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량을 확대한 주류 회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기가 가라앉으며 역풍을 맞았다.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로 소비자들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들면서 주류 수요가 위축된 것이다. 이에 제조사들은 뒤늦게 기존 위스키를 처분하며 생산을 중단하기 시작했다. 일본 음료 그룹 산토리는 켄터키에 있는 짐빔 버번의 주요 증류소를 1년 이상 폐쇄했으며, 디아지오는 텍사스와 테네시 시설의 위스키 생산을 올해 여름까지 중단한다.
경기방어주 특유의 '안정성' 잃어
시장은 대표적인 '경기방어주'로 꼽히던 주류 산업이 경기 침체와 함께 위기에 빠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경기방어주는 경기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실적을 내는 업종으로, 경기 상황에 둔감해 경기둔감주라고도 한다. 경기방어주의 주가는 흔히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덜 하락하고, 경기가 좋을 때는 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주가 변동 폭 자체가 크지 않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경기방어주로는 생활필수품 및 식료품, 의료·제약 산업, 통신, 주류, 담배, 전기, 가스, 유통, 에너지 등이 꼽힌다.
이 같은 경기방어주의 특성은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이 본격화하기 전인 지난해 초 경기방어주들이 미국 주식 시장에서 보여준 주가 흐름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상위 500개 기업의 주가 성과를 추적하는 S&P 500 지수는 2025년 1분기 동안 -4.6% 하락하며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기술주를 중심으로 한 고평가 부담과 경기 둔화 우려가 겹치면서 지수 전반의 변동성이 확대된 결과다.
하지만 동일 기간 헬스케어, 필수 소비재, 유틸리티 등 경기방어주로 꼽히는 섹터는 각각 6.1%, 4.6%, 4.1% 수익률을 기록하며 지수 대비 플러스 성과를 냈다. 증시 변동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실적 추정치가 급격히 흔들리지 않는 경기방어주에 대한 상대적인 선호가 높아진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IB업계 관계자는 "2025년 초 경기방어주들은 필수재 수요와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기반으로 지수 하락 국면에서도 낙폭을 제한했다"며 "이후 AI를 중심으로 시장 판도가 변화하며 존재감이 점차 희석됐지만, 지수 조정 국면에서의 방어력은 분명히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주류 소비 트렌드의 변화
다만 글로벌 주류업계는 이 같은 경기방어주로서의 특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경기 침체와 함께 급락했다. 전 세계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한 '헬시 플레저' 트렌드 등으로 인해 주류 소비량 자체가 감소한 결과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데이터에 따르면 다수 회원국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2011년 이후 꾸준히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갤럽은 '현재 술을 마신다'고 답한 만 18~34세 미국 젊은 층의 비중이 2023년 59%에서 지난해 8월 50%까지 떨어졌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2024년 글로벌 주류 판매량은 4,772억 병으로 2018년(4,968억 병)보다 약 4% 감소(영국 주류시장연구기관 IWSR 집계, 500ml 한 병 기준)했다.
기존 주류 시장에서 이탈한 소비자들의 수요는 무알코올 주류 시장으로 이동했다. 주류 시장의 판도 자체가 재편되기 시작한 셈이다. ‘맥주의 나라’로 불리는 독일의 변화는 최근 주류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독일 내 맥주 판매량은 약 68억 리터로 전년 대비 약 2%, 2014년 대비 13.7% 감소했다. 반면 독일 내 무알코올 맥주 판매는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무알코올 맥주가 일상에서 소비하는 건강한 음료라는 인식이 확산하며 젊은층을 중심으로 소비가 늘어난 것이다. 이에 독일 양조장은 무알코올 맥주 제품을 줄줄이 출시하며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2014년 3억 리터였던 독일 내 무알코올 맥주 생산량은 2024년 약 6억 리터로 증가했다.
무알코올 트렌드는 핵심 주류 기업들의 행보에서도 두드러진다. 글로벌 맥주 제조사들은 하이네켄 0.0, 기네스 0.0, 버드와이저 제로 등 간판 브랜드의 논알콜 버전을 속속 출시하며 젊은 소비자들의 수요 흡수에 나섰다. 디아지오는 2019년 세계 최초의 논알코올 증류주 ‘시드립’을 인수하며 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IWSR에 따르면 향후 세계 논알코올 음료 시장은 2028년까지 연 7% 성장해 40억 달러(약 5조9,180억원) 이상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