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투자로 포장된 미국 회사채 발행 급증, 낮은 금리 활용한 ‘차입 러시’
AI 투자로 포장된 미국 회사채 발행 급증, 낮은 금리 활용한 ‘차입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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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회사채 발행액 사상 최고치 근접
국채 금리 상승에도 수요심리 경색
기업 차입 유인↑, 부채 누증 경고등

미국 기업들의 투자등급 회사채 발행 규모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수준에 근접하며 빠르게 불어나는 추세다. 표면적으로는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주된 배경으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낮은 차입 비용을 활용해 불확실한 경기 국면에 대비하려는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동시에 국채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투자자 자금이 회사채로 이동하고, 기업들 역시 우량 회사채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흐름이 포착된다. 시장의 이목은 AI 투자 열기 속에서 확대되는 차입과 채권시장 구조 변화가 향후 어떤 부담으로 돌아올지로 쏠리는 양상이다.
‘차입 면죄부’로 작동하는 AI
23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은 올해 초부터 11월 말까지 1조7,000억 달러(약 2,482조원) 규모의 투자등급 회사채를 발행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기업들이 대거 유동성 확보에 나섰던 2020년의 1조8,000억 달러(약 2,628조원)에 근접한 수준이다. 이처럼 회사채 발행이 급증한 배경으로는 아마존과 오라클,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AI) 관련 투자가 지목된다. 골드만삭스 집계에서 AI 관련 차입은 현재 전체 투자등급 회사채 순발행의 약 30%를 차지했다.
아마존은 지난 11월 150억 달러(약 22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아마존이 미국에서 채권을 발행한 것은 지난 2022년 11월 이후 약 3년 만의 일로, 회사는 채권 발행의 이유로 자본지출(Capex) 등을 포함하는 일반 기업 목적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선 지난 9월에는 오라클이 클라우드 부문 투자를 명목으로 180억 달러(약 26조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했으며, 10월에는 메타가 데이터센터 증설 등을 이유로 300억 달러(약 44조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했다. 여기에 알파벳(미국 시장 175억 달러·약 25조5,000억원, 유럽 시장 75억 달러·약 11조원)까지 가세하면서 이들 4개 빅테크가 공식 발행한 회사채 규모는 올 하반기에만 총 880억 달러(약 129조원)에 달했다.
회사채 발행이 소수 기업의 단발성 자금 조달이 아니라 업계 전반의 공통된 선택으로 확산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FT는 이번 회사채 발행 증가가 단순한 성장 투자 확대라기보다 비교적 낮은 차입 비용을 활용해 기존 부채를 재조정하고, 향후 경기 둔화 가능성에 대비하려는 기업들의 전략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특히 AI 인프라 구축은 데이터센터와 전력 설비 등 대규모 선투자가 불가피한 영역으로, 단기간 내 수익 회수가 어려운 항목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당장의 실적 개선과는 무관하게 자금 확보를 서두른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AI 투자라는 명분 아래 차입의 성격을 흐린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표면적으로는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전력 인프라, 반도체 설비 투자 등으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불확실한 경기 환경 속에서 현금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방어적 차입’의 성격이 짙다는 비판이다. FT는 “AI 관련 차입 규모와 해당 기업들의 매출 간 괴리가 확대되는 추세”라고 짚으며 “지금과 같은 회사채 발행 증가세가 이어질 경우, 누적된 부채 부담이 향후 기업 실적과 신용도에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우량 회사채-국채 금리 역전
국채 대신 회사채를 선택하기 시작한 투자자들의 움직임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최근 시장에서는 국채 발행 물량이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수요 부진이 반복되며 국채의 상대적 매력이 약화됐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실제 미국 재무부가 5월 실시한 20년 만기 국채 입찰에서 평균 낙찰 금리는 5.047%로 2023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5%를 넘어섰다. 입찰 직후에도 20년물 국채 금리는 5.103%까지 치솟으며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고, 30년물 국채 금리 역시 5.09%로 올라 시장 전반의 불안 심리를 드러냈다.
이처럼 국채 금리가 상승에도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은 투자자들의 시선이 점차 다른 채권 자산으로 이동함을 시사한다. ICE데이터인디시스에 의하면 9월 기준 투자등급 회사채 스프레드는 0.74%p까지 축소되며 1998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고, 10월에도 0.75% 안팎에 머물며 저점 수준을 유지했다. 스프레드 축소는 투자자들이 신용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회사채를 매입에 나던 데 따른 결과다. 이를 두고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투자처를 찾는 현금이 여전히 넘쳐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과정에서 우량 회사채의 매력은 더욱 부각되는 흐름이다. 미국 금융시장 업계 단체 시프마(SIFMA)에 따르면 투자등급 AAA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해 6월 발행한 2027년 6월 만기 회사채의 금리는 9월 말 기준 3.63%로, 비슷한 시점 만기인 3년물 미국 국채 금리 3.69%를 하회했다. 두 금리는 발행 이후 한동안 유사한 흐름을 보였으나, 지난 8월 이후 MS 회사채 금리가 국채 금리를 밑도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는 투자자들이 국가 신용보다는 개별 우량 기업의 안정성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지난 7월 중순 4.48%를 고점으로 이후 하락세를 이어가 현재 4.16% 수준까지 내려왔지만, 회사채와 국채 간 금리 역전 현상은 여전히 뚜렷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의 배경으로 수요 주체의 특성을 지목했다. 피델리티 인터내셔널의 마이크 리델 매니저는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MS를 비롯한 상위 등급 회사채는 유동성 프리미엄만으로도 국채보다 15~20bp(1bp=0.01%) 높은 금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짚으며 “공급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를 쫓는 자금이 과도하게 몰리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국채 불신이 키우는 회사채 의존도
문제는 투자자뿐 아니라 기업들의 우량 회사채에 대한 의존도 역시 과도하게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재무부가 채권 발행 비중을 단기물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하는 과정에서 담보채권 당일금리(SOFR)가 급등하는 ‘발작적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연방준비제도(Fed)는 상시 레포제도(SRF)를 본격 가동하며 단기 유동성 압박 해소에 만전을 기울였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 입장에서 국채 금리를 기준으로 한 전통적인 자금 조달 환경이 더 이상 안정적인 기준점으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채에 대한 신뢰 약화는 기업들의 차입 선택을 더욱 회사채 쪽으로 밀어붙인다.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의 미국 국채 보유 축소, 신용등급 강등, 대규모 입찰 부진 등은 국채의 ‘무위험 자산’ 이미지를 흔들면 기업 입장에서 국채 금리를 기준으로 한 자금 조달 비용 예측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반면 우량 회사채는 풍부한 수요를 바탕으로 발행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지는 데다, 기업들 역시 이를 활용해 만기를 장기화하고 차입 시점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형국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금리 변동 위험을 낮추고 현금 흐름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부채 총량을 빠르게 불려 장기적인 재무 부담을 키울 가능성도 내포한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 채권 시장의 초점이 성장보다는 ‘침체 대비’로 이동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대규모 국채 발행 가능성이 거론되고, 재정 적자와 이자 부담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질수록 국채와 회사채 모두에서 자금 조달 환경은 점차 방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기업들은 낮은 금리를 활용해 최대한 자금을 선확보하려는 유혹에 노출되고, 이는 우량 회사채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시장에서 “향후 경기 침체가 현실화할 경우, 누적된 부채가 충격을 극대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경계가 짙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