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산업정책 확산에 흔들리는 WTO, 새 통상 질서 모색해야
[딥폴리시] 산업정책 확산에 흔들리는 WTO, 새 통상 질서 모색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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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정책 경쟁 확산에 따른 WTO 개혁 필요 보조금 경쟁 견제와 분쟁 해결 기능 복원 중견국 연대 기반의 통상 질서 재편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운영돼 온 국제 통상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현재 세계 상품 무역 가운데 WTO의 기본 규범이 적용되는 비중은 72%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무역협정(FTA) 확대와 산업 지원 정책, 무역 규제 강화가 맞물리면서 국가 간 교역은 WTO 공통 규범보다 개별 협정과 자국 중심 정책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구조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교역 규모는 증가하고 있지만 무역 질서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은 이전보다 약화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WTO 개혁은 글로벌 경제와 경제 안보를 둘러싼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산업정책 확산에 흔들리는 WTO 체제
최근의 통상 갈등을 두고 자유무역 체제 자체가 실패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근본적인 문제는 WTO 규범이 글로벌 산업 구조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WTO는 그동안 관세 인하와 분쟁 해결을 통해 세계 무역 확대를 뒷받침해 왔지만, 청정기술과 전기차, 반도체, 핵심 원자재를 둘러싼 국가 주도 산업정책 확산에는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글로벌 교역 자체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역 규모는 확대되고 있지만 규범에 대한 신뢰는 약화되는 상반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세계 상품 무역은 4.6% 증가했으며 상품·서비스 무역 규모는 약 34조6,500억 달러(약 5경2,595조원)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무역 확대와 함께 각국의 수입 규제와 무역 장벽도 빠르게 늘어났다. WTO에 따르면 수입 규제 조치의 영향을 받은 무역 규모는 2024년 10월부터 1년간 2조6,400억 달러(약 4,007조원)로 전년 대비 4배 증가했다. 무역 규모는 커졌지만 국제 통상 규범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약화되는 양상이다.

국가 지원 확대와 통상 규범의 충돌
WTO 개혁 논의가 보조금 문제에 집중되는 이유는 국가 지원 정책이 통상 갈등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친환경 산업과 반도체, 핵심 광물 등 전략 산업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면서 각국 정부의 재정 지원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개발도상국 역시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수단이 필요하지만, 정부 지원이 장기간 지속되거나 특정 기업에 집중될 경우 시장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행 WTO 규범은 신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지원과 이미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기업에 대한 지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제조업 그룹 및 산업 기업(MAGIC) 보조금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국가 지원 규모는 최근 빠르게 확대되는 추세다. 2024년 15개 주요 산업에 제공된 정부 지원 규모는 약 1,080억 달러(약 163조9,000억원)에 달했다. 특히 중국 기업들은 2005년부터 2024년까지 OECD 국가의 유사 기업보다 3~8배 많은 국가 지원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지원은 태양광과 반도체, 알루미늄, 철강, 조선업에 집중됐으며 이들 산업은 에너지와 국방, 운송, 제조업 경쟁력의 기반을 이루는 분야다.
중국 태양광 산업은 보조금과 공급망 문제를 둘러싼 WTO 개혁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24년 기준 중국은 세계 폴리실리콘 생산의 93.2%, 웨이퍼의 96.6%, 태양전지의 92.3%, 태양광 모듈의 86.4%를 차지했다. 국제단체 21세기를 위한 재생에너지 정책 네트워크(REN21)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은 글로벌 태양광 공급망 생산능력의 약 80%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대규모 생산 체제는 태양광 설비 가격 하락을 이끌며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전환을 크게 앞당겼다. 그러나 공급망이 특정 국가에 집중되면서 수입국의 대중 의존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수입 규제나 생산능력 제한에 나설 경우, 비용 상승과 에너지 전환 둔화라는 부담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보호주의 확산 속 상호 책임의 원칙
WTO 개혁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주요국 모두가 변화한 통상 환경을 인정해야 한다. 중국의 국가 지원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국의 보조금과 무역 제한 조치를 확대하는 상황에서는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미국은 관세와 반덤핑 조치, 수출 통제, 투자 심사를 강화해 왔고, 유럽연합(EU)도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규제를 확대하는 동시에 자국 산업 지원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산업 경쟁력 확보와 공급망 안정이 주요 정책 목표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 개입은 통상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부상했다. 과거 시장 중립성 원칙만으로 현재의 통상 질서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에 따라 WTO 개혁은 특정 국가를 겨냥한 규제보다 주요국이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공통 규범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중국은 과잉 생산능력과 시장 왜곡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필요가 있으며, 미국과 유럽도 중국이 핵심 산업의 주요 공급국으로 자리 잡은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공급망 분절과 비용 증가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산업 경쟁력을 단순히 보조금만으로 설명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광범위한 공급망, 축적된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높여 왔다. 따라서 정책 지원에 따른 시장 왜곡과 기업의 실질적 경쟁력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 각국 정부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도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WTO 정상화 위한 제도 개혁 과제
국제 통상 규범은 실효성 있는 집행 체계를 갖춰야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WTO 분쟁해결제도에서 상소기구는 사실상 최종 판단 기능을 맡아왔지만 2019년 말 이후 기능이 중단된 상태다. 다자간 임시상소중재제도(MPIA)가 일부 공백을 메우고 있으나 제한된 회원국만 참여하고 있어 기존 체계를 완전히 대신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새로운 보조금 규범 역시 실질적인 구속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기업들이 다자 규범보다 각국의 국내 구제 조치에 의존하게 되면 국제 통상 환경의 예측 가능성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WTO 개혁은 보조금 규율 강화와 함께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분쟁해결체계 복원을 병행해야 한다.
분쟁해결체계 복원과 별개로 의사결정 구조 개편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WTO의 만장일치 원칙은 회원국 간 이해관계를 폭넓게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복잡해진 통상 환경에서는 제도 개편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회원국이 먼저 협정을 체결한 뒤 참여 범위를 넓혀가는 복수국 간 협정(Plurilateral Agreement)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EU)은 주요국과 중견국을 잇는 조정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시장 가운데 하나를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복수국 간 협력이 개발도상국을 배제하는 형태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 이행 유예기간과 기술 지원, 제도적 지원 방안을 함께 마련해 개발도상국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이 선행되어야 한다. WTO 개혁의 지속 가능성 역시 더 많은 국가가 새로운 통상 규범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달려 있다.
새 통상 질서 구축의 조건
미·중 전략 경쟁과 통상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국가 간 신뢰는 예전보다 약화됐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망과 교역 구조가 긴밀하게 연결된 현실을 고려하면 경제 관계를 완전히 분리하는 접근 역시 현실성이 낮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국가 간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공통 규범 아래 협력을 유지하는 새로운 통상 질서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는 보조금 정보 공개 확대와 국가 지원 정책에 대한 규율 강화, 과잉 생산능력 산업에 대한 분야별 협의, 분쟁해결제도 정상화 등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는 주요국의 정책 운용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관세 조치는 명확한 근거와 목적 아래 제한적으로 활용돼야 하며 정기적인 검토 절차를 거쳐야 한다. 공급망 정책도 생산 시설의 무조건적인 자국 유치보다 실제 위험이 집중된 분야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는 국가 간 경쟁을 억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경쟁이 통상 질서의 불안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공통의 통상 규범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국제 통상 체제는 중요한 전환점에 놓여 있다. 보조금 경쟁이 구조적으로 고착되기 전에 관련 규범을 정비하고 분쟁해결제도의 기능을 복원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주요국과 중견국이 참여하는 협력 기반 확대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WTO 개혁은 기존 자유무역 체제를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변화한 산업 환경과 경제 안보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통상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 될 전망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TO Reform After the Subsidy Shock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