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피난처’ 스위스 넘은 홍콩, 중동 분쟁·중국 자본·AI 열풍이 바꾼 돈의 흐름
‘부의 피난처’ 스위스 넘은 홍콩, 중동 분쟁·중국 자본·AI 열풍이 바꾼 돈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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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스위스 누르고 역외 자산 허브 1위 자산 규모 2조9,500억 달러, 60%가 중국 본토 자금 저세율 정책·IPO 시장 활황에 따른 자금 집결

홍콩이 사상 처음으로 스위스를 제치고 세계 최대 역외(크로스보더) 자산관리 허브에 올라섰다. 미·중 갈등과 지정학 불안이 커지자 전 세계 부유층이 자산을 여러 국가에 분산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 자금이 대거 홍콩으로 몰린 것으로 분석된다. 홍콩은 자금 흐름을 흡수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 중국 본토와 지리적으로 연결돼 있고, 국제 금융시장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위안화 자산과 달러 자산을 함께 운용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강점으로 꼽힌다.
부자들 몰린 새로운 ‘비밀 금고’
1일(현지시간) 글로벌 대형 경영 컨설팅기업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발간한 ‘2026 글로벌 웰스 리포트’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금융자산 규모는 전년 대비 10.7% 증가한 333조 달러(약 50경4,500조원)를 기록했다. 부동산을 포함한 글로벌 순자산 규모는 550조 달러(약 83경3,300조원)에 달했다. 주식시장 강세와 금 가격 상승이 자산 증가를 견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BCG가 더욱 주목한 부분은 부의 이동 경로 변화다.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무역 갈등, 금융 제재 확대가 맞물리면서 초고액자산가(HNW)들이 자산을 여러 국가에 분산 배치하기 시작했고, 그 수혜가 홍콩과 같은 아시아 금융허브로 집중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실제 지난해 말 기준 홍콩에서 운용되는 역외 자산은 전년 동기 대비 10.7% 증가한 2조9,500억 달러(약 4,490조3,000억원)로 집계됐다. 이는 스위스를 처음으로 넘어선 수치다.
스위스 금융기관이 2025년 말 기준으로 운용하는 역외 자산은 전년 말 대비 7.6% 증가한 2조9,400억 달러(약 4,455조5,000억원)로 세계 2위를 기록했다. 3위는 싱가포르(10.3% 증가한 2조1,000억 달러·약 3,180조원), 4위는 미국(7.7% 증가한 1조6,000억 달러·약 2,420조원)이었다. BCG는 이를 일시적 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BCG는 아시아가 유럽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추세 속에서 이번 역전 구도를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콩은 2030년까지 연간 약 9%의 성장이 전망되는 반면, 스위스는 같은 기간 평균 6%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IPO 자금 3분의 1 홍콩으로
초고액자산가들에게 홍콩이 매력적인 이유는 자산 증식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정보업체 LSEG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홍콩에서 IPO와 추가 상장을 통해 조달된 자금은 130억 달러(약 19조7,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2021년 이후 최대치로, 같은 기간 나스닥·뉴욕증권거래소와 최근 급부상한 인도 봄베이증권거래소 등을 모두 앞선 수치다. 올해 1분기 전 세계 IPO 조달액이 400억 달러(약 60조6,000억원)임을 감안하면 전 세계 투자 자금의 3분의 1 이상이 홍콩으로 쏠린 셈이다.
특히 올해 1분기 IPO 조달액의 55%가 인공지능(AI) 및 기술 기업에 집중되면서 홍콩은 ‘기술 허브’로도 빠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중국 본토와의 연결성 덕분으로, 홍콩 자산의 60%가량이 중국 자금이다. 올해 중국 AI 기업 즈푸(Zhipu)와 미니맥스(MiniMax)는 홍콩 증시에서 IPO를 통해 총 13억 달러(약 2조원)를 조달했으며, 상장 이후 주가도 400% 이상 상승했다.
시장에서는 지난해 딥시크(DeepSeek)가 촉발한 중국발 AI 열풍이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이슨 루이 BNP 파리바 아시아태평양 주식 전략 책임자는 "작년에는 대형 기술주 중심이었다면, 올해는 AI 연구소나 AI 하드웨어 기업 등 '순수 AI 플레이어'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실제 1분기 홍콩 IPO 시장에서는 반도체·AI 관련 기업이 중심을 이뤘다.
홍콩이 중국 기업의 '해외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을 다시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상하이와 선전 증시의 심사 기준이 까다로워지면서 일부 기업들이 홍콩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2024년 이후 배터리 기업 CATL 등 주요 기업들이 홍콩에서 2차 상장을 진행했다. 농업기업 무위안식품, 편의점 체인 바쁜밍 등 다양한 업종 기업도 상장에 나서며 산업군 역시 확대되는 모습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현재 홍콩 증시에는 400개 이상의 기업이 상장을 준비 중이다.

자산관리 허브 경쟁 판도 변화
홍콩 정부의 패밀리오피스(FO) 세제 정책도 초고액 자산 유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홍콩에서는 자본이득세, 부가가치세(VAT), 유산세, 상속세가 없으며, 배당금이나 이자에 대한 원천징수세도 부과되지 않는다. 법인세는 2단계 구조로, 기업 이익 중 최초 200만 홍콩달러(약 4억원)에 대해 8.25%의 세율이 적용된다. 여기에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싱글패밀리오피스(SFO)의 경우 세금 면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자산 보존과 관리가 주목적인 자산가들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최근 수년간 글로벌 주요 도시들이 세금 인상을 추진해 온 흐름과 대비된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경우 2023년 법인세를 도입해 세율이 기존 0%에서 9%로 상승했다. 일본 역시 4월부터 각 사업연도 법인세액에서 500만 엔(약 4,700만원)을 공제한 금액의 4%를 추가로 부과하는 방식으로 법인세를 인상했으며, 미국 뉴욕주에서도 법인세 인상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역시 순자산 10억 달러(약 1조5,000억원)를 초과하는 거주자에게 일회성 5% ‘부유세’를 부과하는 방안이 2026년 주민투표 안건으로 추진되고 있다.
홍콩 정부는 또 FO 수요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SFO가 관리할 수 있는 적격 투자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홍콩 정부는 SFO와 가족 소유 투자 지주회사, 투자 펀드 등을 대상으로 세제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있다. 금과 같은 귀금속, 디지털 자산, 사모 대출 등 다양한 자산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가 핵심이다. 중동 정세 불안과 고액자산가의 분산 수요도 홍콩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정학적 긴장, 제재 리스크, 지역 분쟁은 패밀리오피스의 자산 배치 기준을 바꿨다. 자금은 단일 허브 집중을 피하고 복수의 관할권에 나뉘어 배치되는 흐름을 보였고, 홍콩은 아시아 성장산업과 중국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 거점으로 부상했다.
두바이의 경우 최근 수년간 중동·남아시아·유럽 자산가의 피난처로 급부상했지만, 홍콩은 중국 본토 자본과 글로벌 기관투자가를 동시에 연결하는 기능에서 차별화된 흡인력을 확보했다. 특히 패밀리오피스는 단기 수익률보다 상속, 지배구조, 세무, 비상장·상장 투자 회수 경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데, 홍콩의 법률·회계·프라이빗뱅킹 인프라는 이 복합 수요를 받아낼 수 있는 제도적 밀도를 갖췄다. 홍콩의 이 같은 강점은 자본 시장과도 직결된다. 패밀리오피스는 비상장 성장기업, 프리IPO, 상장 후 지분 투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홍콩 IPO 시장이 되살아날수록 패밀리오피스의 투자 회수 경로가 넓어지고, 이 회수 가능성은 다시 신규 자산 유입을 자극한다. 자산관리와 자본시장이 서로를 강화하는 순환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중국 당국의 금융연계 정책도 홍콩의 역외자산 확대를 뒷받침했다. 홍콩금융관리국(HKMA)에 따르면 ‘웨강아오 대만구(GBA) 자산관리연결제도(WMC)’는 2021년 9월 출범 이후 본토·홍콩·마카오 거주자가 각 시장의 자산관리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공식 통로로 기능해 왔다. 2024년에는 투자자 요건 완화, 참여 기관 확대, 적격 상품 범위 확대, 개인 투자 한도 상향 등 개선 조치가 추가됐다. 이는 중국 본토 개인투자자의 홍콩 금융상품 접근성을 높이고, 홍콩 자산관리 업계의 중국계 자금 흡수 기반을 넓힌 제도적 장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