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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파이낸셜] 98조 달러 부채의 압박, 무력해진 유럽의 저금리 카드

[딥파이낸셜] 98조 달러 부채의 압박, 무력해진 유럽의 저금리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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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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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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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채 구조가 잠식한 통화정책 전달 경로
단일 통화·분절 재정의 구조적 충돌
통화 복원의 출발점, 재정 신뢰 회복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의 통화정책이 예전만큼 경기 회복을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중앙은행(ECB)이 반복해 온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은 한동안 투자와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며 성장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번 국면에서는 같은 처방이 같은 효과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유럽의 공공부채는 98조 달러(약 142경원)로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94%에 달한다. 부채가 누적된 환경에서는 금리 인하가 차입 비용 절감이라는 긍정적 신호보다 재정 부담 확대 우려를 먼저 자극한다. 금리 변동이 곧바로 국가 이자 비용과 재정 건전성 논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시장은 통화 완화를 성장의 신호라기보다 재정 압박의 전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유럽이 마주한 문제는 단순한 경기 둔화가 아니다. 통화정책이 실물경제로 전달되는 경로와 강도가 구조적으로 약화됐다는 점이 핵심이다.

2010년대 성공 공식의 소멸

2010년대 유럽은 제로 하한선(Zero Lower Bound) 환경에서도 통화정책만으로 회복을 이끌어냈다. 정책 금리를 사실상 제로 수준까지 낮추고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했으며, 저금리를 장기간 유지하겠다는 신호를 일관되게 보냈다. 이 조합은 금리 인하를 넘어 기대를 움직이는 전략이었다. 중앙은행의 확고한 약속은 장기 금리를 끌어내렸고,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하락하면서 투자 여건이 개선됐다. 설비 투자와 고용 확대가 뒤따르며 회복의 선순환도 형성됐다.

또한 당시에는 저금리 환경이 자산 가격 상승을 견인했고, 이는 금융 안정으로 이어졌다. 차입 확대가 곧바로 불안 요인으로 전환되지도 않았다. 자산 가치 상승은 가계와 기업의 재무 상태를 개선했고, 이는 소비와 투자 확대로 연결됐다. 통화정책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동시에 자극하던 시기였다.

덴마크 경제학자 닐스 아빌드그렌(Niels Abildgren)과 마르쿠스 쿠흘러(Markus Kuchler)가 유럽 정책·경제 분석 플랫폼 복스유(VoxEU)에 발표한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후 기업들은 예치금 비용을 줄이기 위해 현금 보유 대신 설비 투자와 고용 확대를 선택했다. 금리 정책이 금융 시스템을 거쳐 기업의 의사결정으로 전달된 대표 사례다. 핵심은 정책의 지속성에 대한 신뢰였다.

고부채 구조가 잠식한 금리 효과

그러나 지금은 전제가 달라졌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럽의 공공부채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에너지 충격을 거치며 크게 늘었고,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부채 규모가 확대된 상황에서는 금리 변동이 곧바로 정부의 이자 비용에 반영된다. 장기 금리가 소폭만 움직여도 재정 지출 구조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통화 완화가 성장 신호로 읽히기보다, 재정 부담 확대의 전조로 해석되기 쉽다.

실물 지표 역시 이를 방증한다. 유럽 투자은행(EIB)의 '2023/2024 투자 보고서'는 저금리 환경에도 불구하고 설비투자 확대가 제한적이었다고 분석했다. 2024년 말 유로 지역 은행 대출 증가세도 둔화됐다. 자금은 공급됐지만 수요가 충분히 따라오지 않았다. 기업들은 차입을 늘리기보다 현금 보유를 선택했다. 과거처럼 금리 하락이 곧 투자 확대를 의미하지 않는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통화정책의 수단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효과가 실물경제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구조적 제약이 커지고 있다.

주: 재정 제약이 존재하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비교해, 비용상승(cost-push) 인플레이션 충격 발생 이후 산출, 물가, 금리, 세율, 정부부채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조정되는지를 보여준다. 재정 제약이 있을 때 인플레이션과 금리의 조정 경로가 더 완만하며, 정부부채 감소 속도도 달라진다.

단일 통화와 분절 재정의 충돌

이 같은 변화는 유럽의 제도적 구조와도 맞물린다. 유럽은 단일 통화를 사용하지만 재정은 회원국별로 분리돼 있다. ECB의 단일 금리 정책은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각국의 부채 수준과 재정 건전성은 크게 다르다. 이 격차는 정책의 파급력을 갈라놓는다. 일부 고부채 국가에서는 위험 프리미엄이 높게 형성되며 중앙은행의 완화 효과를 상당 부분 상쇄한다.

그 결과 동일한 금리 인하 조치도 국가별로 상이한 금융 반응을 낳았다. 재정 여력이 안정적인 국가는 정책 효과가 비교적 빠르게 반영됐지만, 부채 부담이 큰 국가는 자금 조달 비용이 충분히 낮아지지 않았다. 단일 정책이 균등한 결과를 보장하지 못하는 구조다.

시장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ECB가 장기간 저금리를 유지하겠다고 밝혀도, 회원국별 재정 상황이 다르면 그 약속은 동일한 신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기대 형성 기능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기업과 투자자는 금리 수준뿐 아니라 재정의 지속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한다. 그 결과 장기 설비 투자와 고용 확대 결정이 지연됐다. 통화정책의 메시지가 실물경제로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구조가 점차 고착화되는 형국이다.

주: 재정 여력이 충분할 때는 통화정책이 물가와 금리를 안정적 균형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재정 여력이 제한될수록 동일한 마크업 충격에서도 인플레이션 편향이 발생하고, 재정 여력이 없는 경우에는 인플레이션 악순환(Inflationary Spirals)이 나타난다.

통화 복원의 출발점, 재정 신뢰

해법은 추가적인 통화 완화에 있지 않다. 재정에 대한 신뢰 회복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 부채가 관리 가능한 경로 위에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금리 인하는 성장 동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금리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다.

녹색 에너지와 디지털 전환처럼 생산성을 높이는 분야에 대한 투자가 구조적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단기적 경기 대응을 넘어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지출은 장기적으로 부채 부담을 흡수할 기반을 마련한다. 결국 지출의 규모보다 자원이 어디에, 어떻게 배분되는지가 핵심 변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2026년 정책보고서 'Working Paper No.1328'에서 재정 여력의 축소가 통화정책의 효과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 공간이 좁아질수록 금리 조정의 파급력은 줄어들고 금융시장 변동성은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통화와 재정이 조율되지 않는다면 정책 신뢰의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금리 인하만으로는 정책 효과를 확보하기 힘든 구조다.

현재 유럽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저금리에 기대는 성장 경로를 유지할 것인지, 재정 구조를 재설계해 통화정책의 효율을 되살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값싼 자금이 자동적으로 경기를 끌어올리던 환경은 이미 지나갔다. 통화정책의 복원은 결국 재정 신뢰에서 출발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Cheap Money Stops Working: Why the Zero Lower Bound no longer revives Europe’s economy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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