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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티 품목’ 된 러시아산 에너지 연이은 평화 협상 무산에 뿔난 트럼프 미국 글로벌 통제력 강화 의도 드러나

미국 상원이 러시아산 원유·가스·우라늄을 수입하는 국가에 최대 500%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글로벌 에너지 무역 구조에 충격을 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종전 메시지를 무시한 러시아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해석되는 가운데, 인도·중국 등 주요 수입국들도 영향권에 놓였다. 글로벌 에너지 질서의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략적 에너지 외교 또한 주목받는 모습이다.
3차 플레이어까지 겨냥한 경제 전쟁 확장 전략
28일(이하 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상원은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의원, 리처드 블루먼솔 민주당 의원 등 82명의 의원이 공동 발의하는 형태로 러시아 제재 법안을 준비 중이다. 초당적 동의를 얻은 해당 법안 초안은 러시아산 석유나 석유제품, 천연가스, 우라늄 등을 구입하는 나라를 상대로 대미 수출품에 최대 500%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해 온 관세를 지렛대로 활용해 러시아와 협상을 유도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그레이엄 의원은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법안 추진의 배경을 밝히며 “모스크바의 깡패(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와 관련해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푸틴이 게임을 계속한다면, 미 상원은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미국은 러시아산 자원에 대한 직접 제재는 꾸준히 강화해 왔지만, 이를 수입하는 제3국마저 제재하겠다는 접근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러시아산 에너지 수요 자체를 축소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공급망 압박을 통한 고립 전략의 다음 단계로 해석된다. 이에 따라 러시아산 석유의 최대 수입국인 중국은 물론 일본 등 동맹국의 에너지 조달도 일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일본은 자국 기업이 참여하는 러시아 극동 에너지 개발사업 ‘사할린-2’에서 생산되는 LNG의 약 60%를 수입 중이다.
종전 합의 외면 러시아, 트럼프 인내도 끝났다
미국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국 제재는 표면적으로 경제 정책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 시그널’이 무시당한 데 대한 보복적 성격이 짙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을 호소하며 러시아에 휴전을 촉구했지만, 러시아는 번번이 ‘침묵 전략’을 택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푸틴은) 완전히 미쳤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 정치권에서는 대러 강경파들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그간 유지해 온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거둬들였다.
이번 정책의 또 다른 맥락은 미국의 정치적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강경 대응을 하는 동시에 자국 내 자원 산업을 부흥시킬 명분도 얻고 있다. 러시아산 자원 수입을 어렵게 만들수록 미국 내 셰일 가스, 석탄, 원자력 산업이 반사이익을 얻는 구조다. 에너지 안보와 경제 정책을 정치 전략과 연결하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행보가 이번 조치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에너지 질서 ‘설계자’ 노리는 미국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태세 전환은 지난 4월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 상호 관세를 부과하는 대규모 계획에서 러시아를 제외했던 것과 상반된 움직임이다. 지난달 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우리나라는 약탈당하고, 약탈당하고, 강간당하고, 약탈당했다”고 말하며 광범위한 상호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했다. 해당 조치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을 포함한 180개 국가가 영향을 받았지만, 러시아는 명단에서 빠졌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제재 대상인 이란과 시리아에는 각각 10%와 40%의 추가 관세가 부과됐다.
이에 대해 백악관 관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제재로 미국과 러시아 간 무역이 이미 제로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쟁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엔 10%의 관세가 부과됐고, 다수의 옛 소련 위성국 및 공화국들도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됐다는 점에서 이 같은 해명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언제든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N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유혈 사태 종식에 합의할 수 없고, 그것이 러시아의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러시아에서 나오는 모든 석유에 2차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준 두 애스턴 경영대학원의 경제학과 교수는 해당 조치에 대해 “2차 관세는 제3국이나 이중 용도 기술과 같은 제한된 상품을 러시아로 재운송하는 기업을 표적으로 삼아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집행 도구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중개자를 통한 제재 회피를 막고, 러시아와의 사업 비용을 높이며, 기존 제재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러시아가 병렬 수입 네트워크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어 특히 효과적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