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개발도상국 혁신의 출발점, 공공이 떠안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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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국의 실험을 지탱하는 공공 R&D 보조금의 위험 완충 구조 브라질 농업연구공사(Embrapa)가 보여준 110% 생산성 향상과 17배 수익의 공식 지식 확산이 만들어내는 기술 성장과 산업 효율의 선순환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연구개발(R&D)은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실패의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나라에서는 그 위험이 곧 멈춤의 이유가 된다. 위험을 감수할 자본이 없으면 실험은 중단되고, 중단은 곧 낙후로 이어진다. 개발도상국의 현실이 그렇다. 자본 기반이 약할수록 위험은 단순한 변수가 아니라 생존의 경계가 된다. 실패 한 번이 예산의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에, 기업은 안전을 택한다. 공공이 먼저 위험을 흡수하지 않으면, 민간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 구조는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2023년 전 세계 R&D 지출은 3조 달러(약 4,100조 원)에 달했지만, 저소득 국가는 국내총생산(GDP)의 0.3%도 투자하지 못했다. 세계의 지식 투자가 몇몇 부유한 국가에 집중되면서, 기술 격차는 구조적 단절로 굳어졌다. 민간은 기술의 실패가 재정 파탄으로 이어질 것을 알기에, 연구를 미루거나 포기한다. 결국 ‘하지 않는 선택’이 가장 합리적인 전략이 돼 버린다. 브라질은 이 악순환을 끊었다. 정부는 수입 기술을 단순 이전하는 대신, 공공 자금을 투입해 현지 조건에 맞는 해법을 만들었다. 열대 토양과 고온 환경에 적응한 품종과 재배법을 개발하며, 과학의 초점을 ‘적용 가능한 기술’로 옮겼다.
국가가 위험을 먼저 떠안자, 연구는 지역의 문제로 내려왔고, 민간은 실험의 무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입 과학의 현지화’라는 체계가 구축됐다. 공공의 투자가 시장의 신뢰를 만들어 내면서, 과학은 비용이 아니라 성장의 기반으로 전환됐다. 이 변화는 브라질 경제가 독립적 혁신 단계로 진입하는 전환점이 됐다.
브라질의 선택이 만든 17배의 성장
1973년 설립된 브라질 농업연구공사(Embrapa)는 공공 연구의 힘을 증명했다. 정부는 전국을 40여 개 연구센터로 연결해, 토양·작물·병충해를 각각의 연구 주제로 삼았다. 지역별 연구가 촘촘히 이어지자, 실험 결과는 빠르게 축적됐고, 정책은 현장으로 확산됐다.
그 결과 농업 생산성은 110% 높아졌고, 투자 대비 편익은 17배에 달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공공이 위험을 감당하면, 시장은 혁신으로 보답한다’라는 공식이 입증된 사례다. 생물학적 질소고정 기술은 비료 수입 의존도를 낮췄고, 개량 품종은 불모지를 생산지로 바꿨다. 연구소의 분산 배치는 지역별 문제 해결 속도를 높였으며, 연구 성과는 전국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또한 농업연구공사의 구조는 ‘공공 리스크 흡수 → 지역 맞춤형 연구 → 민간 확산’의 순환을 만들었다. 정부가 먼저 실험의 실패를 감당하자, 종자회사와 농기계 기업이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국가 연구비는 단순 보조금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산성 자산’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브라질의 성공은 모방이 아닌 설계였다. 현지 연구자는 지역 농민과 협력해 토양 조건에 맞는 품종을 만들었고, 정부는 이를 10년 이상 지원했다. 실패를 허용하는 제도가 있었기에, 장기적 성과가 가능했다.

주: 1990년 이후 공공 연구개발 확산으로 생산성이 급등했으며, 대두의 증가세가 가장 두드러졌다.
위험을 감당하지 못하는 시장의 한계
그렇다면 왜 다른 개발도상국의 기업들은 같은 길을 걷지 못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수익의 수학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비는 크고, 시장은 작으며, 회수 기간은 길다. 특허 제도와 법적 보호도 미약해 혁신의 과실이 쉽게 복제된다.
결국 기업은 기다린다.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를 떠안느니, 외국 기술을 수입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이 지연이 반복되면서 ‘기술 격차’는 ‘소득 격차’로 굳어진다. 이런 고착 위에 거시적 제약이 겹친다. 2023년 개발도상국의 외채 상환액은 1조4천억 달러(약 1,900조 원)에 이르러 사상 최대 수준에 달했다. 금리 인상과 환율 불안이 겹치면서 각국 정부는 긴축 재정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 공공 연구비가 가장 먼저 축소됐고,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2005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 R&D 보조금은 단순한 지원책이 아니다. 시장 자금이 빠져나갈 때도 기술 축적을 지키는 ‘마지막 안전판’이다. 연구개발은 단기 수익이 아니라 미래 생산성의 보험이기 때문이다.
저소득국을 위한 정책 설계의 교본
저소득국이 따라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적응형 연구’다. 새로운 발명을 노리기보다, 외국 기술이 현지에서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염분에 강한 벼, 내열성 옥수수, 저가 진단기기 같은 문제를 중심으로 다년간의 프로젝트를 설계해야 한다. 이런 과제는 화려하지 않지만, 국가 생산성을 직접 끌어올린다.
두 번째는 인적 기반이다. 연구 인력이 적은 나라일수록 예산의 중심을 장비가 아닌 사람에게 둬야 한다. 장학금과 현장 실습을 연계하고, 지역별 필드스테이션을 설치해 이동·보관 비용을 줄이는 식이다. 예를 들어 한 생태권마다 곤충학자 한 명, 냉장 체계를 유지할 기술자 한 명을 확보하면, 실험의 성공률이 달라진다.
세 번째는 거버넌스다. 브라질의 교훈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가깝게’였다. 연구소를 수도권이 아닌 농업지대에 두고, 생산자와 공동으로 과제를 설계하면 효율은 배가된다. 모든 결과는 공개돼야 한다. 실패한 실험일수록 데이터로 남겨야, 다음 연구의 비용이 줄어든다. 개방형 데이터는 빈국의 기술 학습을 빠르게 한다. 마지막으로 재원 구조다. GDP의 0.1%만 R&D 보조금으로 전환해도 구조는 달라진다. 비효율적 투입 보조금을 줄이고, 수출품에 소액의 연구 기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외채 의존을 줄이려면 차입보다 기술원조 중심의 국제 협력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주: 분산된 연구소들이 브라질 전역의 생태 지역을 포괄하며, 연구 성과의 현장 확산 속도를 높였다.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의 조건
공공이 위험을 짊어질 때 민간은 비로소 도전할 수 있다. 그 도전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가능성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시도가 쌓이면 생산성이 되고, 그 축적이 산업의 체력을 만든다. 이 단순한 원리가 다시 실험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브라질의 경험이 이를 증명했다. 정부가 먼저 용기를 낼 때 시장은 움직였다. 공공의 결단이 민간의 자신감을 만들고, 자신감은 새로운 투자를 불러왔다. 이 구조가 작동하면 실패는 낭비가 아니라 학습으로 남는다. 실패를 허용하는 사회는 더 많이 시도하고, 그만큼 더 많이 배운다. 배움이 축적되면 기술이 자라나고, 기술은 사람을 남긴다. 지식이 확산되는 사회는 생산성과 기술을 함께 끌어올린다.
공공의 리스크 흡수가 단순한 재정정책이 아니라, 학습 구조를 유지하는 사회적 장치가 되는 이유다. 혁신은 언제나 위험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 위험을 나누는 제도는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공공이 위험을 함께 짊어질 때 사회는 시도의 권리를 회복한다. 그 선택이 늦어질수록, 다음 세대의 기회는 더 멀어진다. 결국 실험을 미루는 사회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위험을 나누면 배움이 생기고, 배움이 모이면 산업이 자란다. 브라질이 남긴 수치는 경제의 공식이 아니라 사회의 약속이다. 공공이 먼저 움직일 때, 성장의 언어는 다시 미래로 이어진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Public R&D Subsidies Are the Risk Buffer Poor Countries Need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