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신뢰와 군비의 역설, 일본의 두 번째 무장이 남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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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군사력의 동반 상승, 불안한 균형 공적안보원조(OSA)와 상호접근협정(RAA), 제도로 포장된 경쟁의 전조 ‘지배 없는 억지’를 시험하는 첫 시험대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 동남아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가는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싱가포르의 동남아연구소(ISEAS) 조사에 따르면, 66.8%의 동남아 오피니언 리더가 일본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책임 있는 행위자’로 평가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호감도를 넘어선다. 식민지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에서 일본이 신뢰의 정상에 오른 것은 이례적이다. 다만 그 배경에는 수십 년간 이어진 개발원조와 산업 협력, 재난 지원이 남긴 현실적 이해관계가 자리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은 GDP 대비 국방비를 2%로 높였고,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400기 도입을 확정했다. 전후 체제 이후 가장 빠른 속도의 군사 확대가 ‘신뢰의 상승’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향의 설정이다. 군사력은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힘을 제도와 규범으로 묶어내지 못하면 지역 질서는 쉽게 흔들린다. 일본의 행보는 이미 동아시아의 안보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동남아가 이 변화에 수동적으로 반응할지, 스스로 규칙을 설계할지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 선택이 향후 10년의 안정 방향을 결정짓는다.
러시아·중국 공조가 촉발한 동아시아의 재무장 압력
2024~2025년 러시아와 중국은 해상과 공중 합동훈련을 확대하며 ‘미국 주도 질서를 대체할 협력’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다. 두 정상의 메시지는 동아시아의 군사 균형을 흔들었다.
이 압력은 일본의 안보 인식을 급격히 바꿨다. 합동 잠수함 순찰이 동해와 태평양을 잇달아 통과했고, 전략폭격기가 홋카이도 인근까지 접근했다. 방공식별구역이 반복적으로 위협받자, 모호했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 일본은 대응 강화를 서두르며 재무장의 속도를 높였다. 장거리 타격능력을 축으로 한 ‘반격 전략’을 공식화했고, 토마호크 도입과 함께 자위대의 작전 반경을 넓혔다. 전후 금기였던 선제 대응의 문턱을 사실상 낮춘 조치다.
그러나 아시아의 맥락은 다르다. 한국과 동남아에는 식민지의 기억이 남아 있고, 그 기억은 여전히 신뢰의 한계를 규정한다. 일본의 군사적 복귀가 협력의 신호로 읽힐지, 과거의 재현으로 보일지는 이 기억을 어떻게 제도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과제는 명확하다. 군비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묶는 절차와 공개성이다. 지금이 역사를 제도 안에서 관리할 마지막 시점이다.

주: 2015~2023년 동안 일본(핑크)의 ODF 공여액이 가장 높았으며, 유럽연합·미국·중국이 그 뒤를 이었다.
66.8%의 신뢰, OSA가 만든 새로운 협력 구조
동남아의 신뢰는 우연이 아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공적개발원조(ODA), 산업투자, 재난 지원이 일본을 주요 대응 주체로 인식하게 했다. 지원의 일관성과 행정의 예측 가능성은 일정한 신뢰로 연결됐다.
이 기반 위에서 일본은 공적안보원조(OSA, Official Security Assistance)를 새로 도입했다. OSA는 비살상 장비를 직접 제공해 안보 영역으로 범위를 넓혔다. 연안 레이더와 구조정, 감시장비가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에 전달되며 공동 운영 체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같은 시기 일본은 방산 수출 규제를 완화했다. 미국에는 패트리엇 미사일 부품을 공급했고, 영국·이탈리아와의 공동전투기(GCAP)에는 조건부 수출의 길을 열었다. 전후 헌법이 정한 수출 제한을 사실상 재해석한 조치다.
그러나 신뢰는 행동보다 관리에서 무너진다. 동남아가 이를 공동 방어로 볼지, 개입의 전조로 인식할지는 투명성에 달려 있다. 장비 제공의 기준과 사용 조건, 정보 공개가 동시에 마련돼야 한다. 얽힘이 깊어질수록 규칙은 더 명확해야 한다. 일본의 역할이 안보 보완으로 남으려면, 감시와 감사가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필수다. 그렇지 않다면 66.8%의 신뢰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남중국해의 시험대, 신뢰를 제도로 바꾸는 순간
2024년 남중국해는 동남아 안보의 불안이 수면 위로 드러난 해였다. 중국 해경은 필리핀이 주권을 주장하는 세컨드 토머스 숄(Second Thomas Shoal) 인근에서 필리핀 보급선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 선원들이 부상을 입고 선박이 손상되면서 충돌은 외교 논쟁을 넘어섰다. 동시에 베트남은 뱅가드 뱅크 인근 해역에서 중국 함정의 잦은 진입을 감시하며 경계를 강화했다.
긴장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위험으로 굳어졌다. 질문은 하나로 모였다. 누가 이 위험을 함께 감당할 것인가. 이에 일본이 대응에 나섰다. 2024년 7월 체결된 일본–필리핀 상호접근협정(RAA, Reciprocal Access Agreement)은 2025년 9월 발효됐다. 법적 기반이 마련되면서, 평시 상호 방문과 공동 훈련이 제도적으로 허용됐다. RAA는 동남아에서 처음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춘 안보 협정으로 기록됐다. 이 협정은 충돌 억제 효과를 높이고, 위기 시 대응 절차를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신뢰가 확대된 만큼, 새로운 긴장도 함께 커졌다. 일본의 반격 능력 강화와 토마호크 배치는 도련선의 균형을 흔들며 중국의 경계심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운영 방식이다. 협정이 해양 치안·구조·정보 공유 중심으로 작동하면 신뢰는 제도로 굳을 수 있다. 반대로 군사력의 과시로 비치면 신뢰는 빠르게 식는다. 남중국해는 ‘무력의 시대’에서 ‘규칙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다.

주: 일본의 국방예산은 550억 달러(약 74조8,000억 원)로, 필리핀 43.8억 달러(약 5조9,000억 원)와 싱가포르 174억 달러(약 23조7,000억 원)를 크게 웃돌았다.
교육으로 세우는 안보, 군사력보다 앞선 규칙
지속 가능한 안보는 무기보다 시민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학교 교육과 교원 양성은 일본의 점령과 전후 관계의 변화, 그리고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형성된 구조를 함께 짚어야 한다.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관계 변화를 객관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해가 넓어질수록 불신은 줄어든다. 교환학생 프로그램, 과학·기술 협력, 해양 직업교육을 공적안보원조(OSA) 사업과 연계하면 기술 인력의 자립 기반이 생긴다.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상호 책임의 틀에서 성과를 관리할 때, 안보는 교육과 산업의 언어로 바뀐다. 시민 교육의 역할도 커졌다. 해양법과 선박자동식별장치(AIS), 해경 발표 해석 방법을 기본 교양에 포함해야 한다. 위기 때 잘못된 정보가 확산되지 않도록 ‘해양 문해력’을 높이는 일은 필수적이다. 교실은 국가의 첫 방어선이며, 교육은 긴장을 완화하는 가장 지속 가능한 제도다.
결론은 분명하다. 필요한 것은 무기보다 제도, 전력보다 신뢰다. 동남아가 지금 투명성과 규범을 갖춘 틀로 신뢰를 제도화한다면, 지배가 아닌 균형의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다. 러시아–중국 공조와 해상 충돌이 이어지더라도, 신뢰는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힘이다. 새벽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교실 창문 너머 바다를 보는 학생의 하루가 평온할 때, 안보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그 평온을 지키는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제도와 시민의 이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Japan’s Second Act and Southeast Asia’s First Choic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