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산불까지" 이상기후에 신음하는 EU, 온실가스는 줄였지만 적응 대책 부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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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 폭염 덮친 EU, 밀·옥수수 등 작물 생산 직격탄 스페인·프랑스 등에서는 이상 고온 및 가뭄으로 대규모 산불 "온실가스만 감축하고 적응은 미흡" EU ESG 정책 한계 가시화

유럽 전역을 덮친 이상기후가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기록적인 고온과 가뭄이 농축산물 생산을 위축시키고, 역내 각국에서 대형 산불을 초래하며 사회 전반의 충격이 가시화하는 양상이다.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이 그간 온실가스 감축에 집중해 강력한 기후 규제 체계를 구축해 왔지만, 이미 현실화한 기후 재난에 대비하는 '적응' 부문에서는 사실상 대처가 미흡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유럽 휩쓴 역대급 폭염
12일(이하 현지시각) CNN에 따르면, 올해 유럽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폭염의 시발점은 지난 5월 말이었다. 당시 서유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평년보다 10도에서 15도 가까이 높은 기온이 관측됐고, 이후 6월 들어 열돔 현상이 시작되면서 위기가 한층 심화했다. 스페인 안두하르 지역의 기온은 45도를 뛰어넘었고, 프랑스에서도 44도를 웃도는 기온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서는 체코와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도 사상 처음으로 40도를 넘는 기온이 확인됐으며, 비교적 기후가 서늘한 북유럽 국가들도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이상기후는 유럽 역내 경제에 직접적인 충격을 안기고 있다. 각국의 농산물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며 식료품 수급이 불안정해진 탓이다. 농작물은 개화기, 등숙기 등 특정 생육 단계에 고온에 노출될 시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밀의 경우 섭씨 31도, 옥수수의 경우 섭씨 35도를 넘는 고온에 짧게 노출되기만 해도 생식 기관이 손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폭염은 유럽의 주요 밀 산지에서 곡물이 여물어 가는 등숙기와 정확히 겹쳤으며, 개화기를 맞이한 옥수수 역시 고온으로 인해 꽃가루가 죽어 알곡이 제대로 맺히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현시점 농업에 특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국가로는 EU 최대 옥수수 생산국인 프랑스가 꼽힌다. 프랑스 농업부는 폭염으로 자국 옥수수 생산량이 최대 30% 줄어들 수 있다고 잠정 집계했다. 옥수수 외 농축산물의 피해도 상당하다. 블룸버그통신, AFP통신 등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프랑스에서는 맥주 원료인 홉의 60%가 타들어 갔으며, 과수원도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가금류 역시 수십만 마리가 폐사했고, 밀 농가에서는 수확량이 채산성의 절반에 그쳤다는 하소연도 나왔다. 이밖에 지중해 최대 올리브 산지인 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도 폭염과 가뭄이 겹치며 올가을 올리브 작황이 악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천 헥타르 규모 산불도 발생
대형 산불 피해도 가시화하고 있다. 유럽연합 산림화재정보시스템(EFFIS)이 지난 8일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EU 내에서 발생한 30헥타르(ha) 이상 규모 산불은 총 1,057건으로 지난 20년간의 장기 평균치(476건)를 두 배 이상 웃돈다. 소실된 면적은 약 15만5,569ha로 지난 20년 평균치 대비 16% 확대됐다. 연이은 폭염과 가뭄 탓에 산불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높은 기온이 유지되는 가운데 장기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토양과 나무의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고, 말라붙은 풀과 낙엽·관목이 불길을 이어 주는 일종의 ‘연료층’이 형성돼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대형 화재로 번지기 쉬워진다.
산불로 인해 가장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한 곳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주 알메리아다. 지난 9일 로스가야르도스 인근에서 시작된 산불은 최대 시속 50㎞ 안팎의 강풍을 타고 주거 지역까지 빠르게 확산했다. 이로 인해 최소 12명이 숨지고 23명이 실종됐으며, 부상자 8명 가운데 4명은 중태에 빠졌다. 대피한 주민과 관광객은 1,400여 명에 달하며, 피해 면적은 이후 5,000~6,000ha 이상으로 확대됐다. 현지 당국은 전력선 추락 가능성 등을 포함해 최초 발화 원인을 조사 중이다.
이달 초 프랑스에서도 동시다발적 산불이 발생했다. 남부 오드·에로·바르를 비롯한 최소 5개 데파르트망(프랑스의 2급 지방 행정구역 단위)에서 불길이 잇달아 번진 것이다. 특히 스페인 국경과 가까운 피레네 지역의 산불은 약 5,000ha의 땅을 불태웠으며, 진화 작업에는 소방관 700여 명이 투입됐다. 지난 12일에는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60㎞ 떨어진 퐁텐블로 숲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해 800ha가 불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남북을 잇는 주요 도로인 A6 고속도로 일부가 폐쇄됐으며, 파리 리옹역을 오가는 고속철도 운행도 최대 6시간가량 지연됐다.

유럽식 기후 대책의 빈틈
이런 가운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럽 기후 대책의 허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 EU는 세계에서 가장 촘촘한 온실가스 감축 규제 체계를 구축해 온 지역으로 꼽힌다. 출발점은 2005년 도입한 EU 배출권거래제(ETS)였다. ETS는 발전소와 철강·시멘트·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 배출량 상한을 설정하고, 기업이 배출한 탄소만큼 배출권을 제출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업에 자발적인 감축을 권고하는 수준을 넘어, 탄소를 많이 배출할수록 생산비가 상승하도록 시장 구조 자체를 바꾼 것이다. EU는 이후 항공·해운 등의 부문까지 ETS 적용 대상을 넓혔고, 2030년까지 ETS 적용 부문의 배출량을 2005년 대비 62% 줄이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러한 탄소 감축 압박은 무역 부문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EU는 CBAM을 통해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등 탄소 집약적 제품을 수입할 때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과하고 있다. 해외 제품에 강력한 탄소 규제를 적용하지 않을 시, 역내 기업들의 투자가 규제 수위가 비교적 낮은 국가로 유출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같은 정책은 실제 유의미한 배출량 감소로 이어졌다. 유럽환경청(EEA)에 따르면 EU의 순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부터 2024년까지 약 40% 줄었다.
문제는 EU가 폭염·가뭄·홍수·산불 등 이미 현실화한 피해를 줄이는 적응 정책에 힘을 싣지 못했다는 점이다. EU 회원국 중 전국 단위의 폭염 보건 대책을 갖춘 국가는 절반에 미치지 못하며, 노후 건축물과 도시 기반 시설 역시 고온 환경을 견디도록 설계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는 관련 분야 투자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21~2025년 EU 공동 예산의 기후 관련 지출 중 72%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완화' 정책에 사용됐다. 기후변화 적응에 배정된 예산은 18%에 불과했고, 두 분야에 함께 쓰인 비용은 9%에 그쳤다. 기후 컨설팅업체 리카르도와 유럽·지중해기후변화센터(CMCC) 연구진 등이 EU 집행위원회 의뢰에 따라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EU와 회원국 정부·민간 부문이 기후 재난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2050년까지 적응 분야에 투입해야 하는 자금은 연간 700억 유로(약 119조7,500억원)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