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배터리 독자 규제에 업계 반기, 중국 공급망 의존 속 비용·공급난 동시 압박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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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규제 강화 나선 EU, 업계 부담 증가 기업 파산·공장 건설 철회로 역내 조달 확대 차질 중국 배터리 기업, 현지 합작 생산으로 공급 공백 공략

유럽연합(EU)의 배터리 규제 강화에 현지 업계가 반발하고 있다. 유해물질 표시 기준 개편으로 기업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에 주요 협회들이 공동 대응에 나섰고, 역내산 우대 정책을 둘러싸고도 공급능력이 규제 요건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실제로 노스볼트의 파산과 ACC의 공장 건설 철회가 겹치면서 유럽산 배터리 공급을 늘리려던 계획은 차질을 빚고 있다. 그 사이 중국 업체들은 유럽에 생산 거점을 늘리고 현지 완성차 기업들과 손잡으며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해 가는 양상이다.
유럽 12개 배터리 협회 공동 반발
4일(현지시각) 유럽 에너지 전문매체 에너지스토리지뉴스에 따르면, 유럽 배터리·에너지저장 업계는 EU의 배터리 유해물질 표시 기준 개편에 반대하는 공동서한을 EU 집행위원회에 보냈다. 지난 2일 집행위에 전달된 서한에는 충전식 배터리 업계 단체 리차지(RECHARGE)와 유럽 자동차·산업용 배터리 제조업체 협회 유로뱃(EUROBAT), 에너지스토리지유럽, 플로우배터리유럽 등 12개 협회가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전기차와 가전제품, 정원용 기계, 전동공구 업계를 대표하는 단체들도 동참했다. 소비자용 배터리와 금속·소재 분야 협회까지 가세하면서 배터리 제조사와 배터리를 사용하는 제품 업체, 원재료 공급업계가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이다.
업계는 EU의 산업·경제·환경 정책을 담당하는 집행부 고위 인사들에게 공동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서한 수신인은 스테판 세주르네 번영·산업전략 담당 수석부집행위원장과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경제 담당 집행위원, 제시카 로스왈 환경 담당 집행위원이다. 집행위원회 사무총장과 EU 이사회 순회의장국인 아일랜드도 참조 수신처에 포함됐다. 협회들은 서한에서 배터리 물질 표시 기준을 둘러싼 협상 방향을 바로잡을 책임이 집행위에 있다고 강조하며, 입법 절차가 끝나기 전 이사회·유럽의회와 협의해 달라고 촉구했다. 서한에는 집행위 제안과 이사회 협상안의 변천 과정을 정리한 비교표, 각 안에 대한 업계 의견을 담은 부속자료도 첨부됐다.
배터리 유해물질 분류 기준 도마
이번 반발의 쟁점은 EU 배터리 규정에 담긴 유해물질 표시 의무의 적용 범위다. 2023년 제정된 규정은 소비자가 배터리를 구매하거나 버릴 때 제품의 성분과 특성을 확인하고, 폐기물 처리업체가 폐배터리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관련 정보를 표시하게 했다. 규정 제13조와 부속서에는 제조사·용량·화학적 조성 등과 함께 배터리에 포함된 유해물질을 표시하도록 명시돼 있다. 수은·카드뮴·납을 제외한 유해물질도 정보 공개 대상에 포함되며, 카드뮴과 납은 일정 함유량을 초과하면 별도로 화학기호를 부착하는 방식이다. 유해물질 정보는 사용을 마친 배터리를 수거·분류하고 적절한 처리 방식을 정하는 데 필요한 항목으로 꼽힌다. 적용 대상에는 전기차용·산업용 배터리와 휴대용 배터리 등이 포함되며, 다른 제품에 내장된 형태로 판매되는 배터리도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논란은 집행위가 기존 화학물질 규정의 고위험성 우려물질(SVHC) 후보목록에 더해 별도의 유해성 분류 기준까지 표시 대상 선정에 반영하면서 불거졌다. 집행위 제안은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와 화학물질 분류·표시·포장 규정(CLP)을 함께 참조해 표시 대상 물질을 정의했다. 이에 대해 업계는 공동서한에서 배터리 제조사와 공급업체가 확인·추적·검증해야 할 물질이 3,000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특히 같은 원료를 공급하더라도 배터리용인지 다른 제품용인지에 따라 제출해야 할 성분 정보가 달라져 공급업체의 업무가 복잡해진다는 주장이다. 협회들은 여러 산업과 국가에 걸쳐 거래하는 기업과 중소업체에 부담이 집중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표시 대상 확대의 환경·보건상 효과를 입증할 영향평가도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표1. EU 배터리 유해물질 표시 의무 및 쟁점
| 구분 | 주요 항목 | 내용 |
|---|---|---|
| 현행 규정 | 표시 목적 | 소비자의 성분·특성 확인 폐배터리 수거·분류·처리에 필요한 정보 제공 |
| 공개 정보 | 제조사·용량·화학적 조성·유해물질 등 수은·카드뮴·납 이외 유해물질도 공개 대상 | |
| 별도 화학기호 | 카드뮴·납 함유량이 일정 기준 초과 시 부착 | |
| 적용 대상 | 전기차용·산업용·휴대용 배터리 등 다른 제품에 내장돼 판매되는 배터리 포함 | |
| 집행위 제안 | 표시 대상 정의 |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화학물질 분류·표시·포장 규정(CLP) 함께 참조 고위험성 우려물질(SVHC) 후보목록 외 별도 유해성 분류 기준 반영 |
| 업계 반발 | 물질 관리 부담 | 제조사·공급업체의 확인·추적·검증 대상 약 3,000종 추산 |
| 공급망 업무 복잡화 | 같은 원료도 배터리용 여부에 따라 제출 성분 정보 차이 여러 산업·국가와 거래하는 기업 및 중소업체 부담 집중 주장 | |
| 효과 검증 부족 | 표시 대상 확대의 환경·보건상 효과를 입증할 영향평가 미제시 비판 |
EU산 조달 요건 강화 앞두고 공급망 경고
표시 기준 개편과 함께 추진되는 역내산 우대 정책을 놓고도 유럽 산업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다. 집행위가 지난 3월 내놓은 산업가속화법(IAA)은 공공조달과 보조금 지원 등에 현지 생산 요건을 부과해 자동차·배터리 생산 기반을 유럽에 확보하려는 법안이다. 집행위 제안에 따르면 배터리는 법 시행 초기 셀을 포함한 주요 부품 3개를 EU산으로 조달해야 하며, 이후에는 양극활물질과 배터리관리시스템 등을 포함한 5개로 요건이 강화된다. 이에 유럽자동차제조업협회(ACEA)는 역내 공급망이 해당 요건을 감당할 준비가 됐는지 검토한 연구를 지난 9월 공개했다. 연구에서는 유럽의 배터리 셀 생산량이 2032년 306기가와트시(GWh)까지 늘더라도, 규제 적용 범위에 따라 설정한 세 가지 시나리오 모두에서 공급이 수요에 못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법이 2028년 발효될 경우 배터리 공급 부족으로 약 300만 대의 차량이 역내산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추산도 제시됐다.
배터리 셀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소재 공급망도 취약한 실정이다. 연구진은 양극재·음극재의 경우 수요를 낮게 잡아도 역내 공급 부족이 2038~2040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공장 증설 계획과 시장 수요 사이의 불일치도 공급 확대의 걸림돌로 꼽혔다. 유럽에서 계획 중인 대규모 배터리 공장 18곳 중 13곳이 니켈·망간·코발트(NMC) 배터리에 집중돼 있어, 중국이 주도하는 저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수요 증가에 대응할 생산 기반이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신규 공장도 자금 조달과 인허가, 건설 지연 위험을 안고 있는 탓에 발표된 생산능력이 실제 공급으로 이어질지 불확실하다고 연구진은 강조했다.
노스볼트 파산 이어 ACC 공장 건설도 무산
유럽 배터리 기업들의 경영난도 역내 공급 확대에 제동을 걸고 있다. 유럽의 배터리 자립을 상징하던 스웨덴 노스볼트는 생산 차질로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서 주요 고객사인 BMW의 대규모 주문을 잃었다. 이후 자금난까지 겹쳐 지난해 3월 파산을 신청했고, 핵심 생산시설인 셸레프테오 공장과 베스테로스 연구개발(R&D) 시설도 올해 2월 미국 배터리 기업 라이텐에 매각됐다. 유럽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려던 노스볼트의 사업이 파산과 자산 매각으로 이어지면서, 생산 재개와 후속 투자를 새 인수자에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던 배터리 생산시설 확충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스텔란티스·메르세데스벤츠·토탈에너지의 합작사 ACC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에 대형 공장을 세워 공급망을 구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과 이탈리아 테르몰리 사업은 2024년 중단된 뒤 재개되지 못했다. 올해 2월 이탈리아 금속노조는 ACC 경영진으로부터 두 사업을 최종 철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두 사업이 무산되면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 3개국에 걸쳐 배터리 양산 체계를 구축하려던 ACC의 계획도 축소됐다. 유럽산업노동조합연맹은 신규 공장 건설로 기대했던 수천 개의 일자리 창출도 불발됐다고 평가했다.
표2. 중국 배터리 업체의 유럽 생산 확대 및 시장 입지
| 구분 | 주요 지표·사업 | 내용 |
|---|---|---|
| 현지 생산 | CATL 헝가리 데브레첸 공장 | 9월 22일 셀 생산라인 2개 시험가동 시작 전체 사업 완료 시 연산 100GWh 유럽 주요 완성차 업체 공급 거점 |
| CATL·스텔란티스 스페인 합작공장 | 사라고사에 최대 연산 50GWh LFP 배터리 공장 건설 중 스텔란티스 자동차 생산시설 인근 입지 양사 지분 각각 50% | |
| 배터리 사용량 (올해 1~8월) | 유럽 전기차용 배터리 전체 | 180GWh 전년 동기 대비 29.6% 증가 |
| CATL | 80.5GWh, 전년 동기 대비 30.3% 증가 유럽 시장 점유율 44.8% | |
| 기타 중국 업체 | 전년 동기 대비 사용량 증가율 BYD 65.5%·SVOLT 83.8%·CALB 96.9% | |
| LFP 배터리 | 33.6GWh, 전년 동기 대비 109.7% 증가 유럽 전체 사용량 중 18.7% |
현지 공장 확충으로 커지는 중국 배터리 영향력
유럽의 배터리 자립 구상이 흔들리는 사이, 중국 최대 배터리 업체 CATL(닝더스다이)은 유럽 완성차 업계의 핵심 공급자로 파고들었다. CATL은 지난 9월 22일 헝가리 데브레첸 공장의 첫 번째 셀 생산시설에서 두 개 라인의 시험가동을 시작했다. 전체 사업이 완료되면 연간 생산능력 100GWh를 갖춘 CATL의 중국 외 최대 생산거점이 된다. 이곳에서는 2024년 가을부터 배터리 모듈을 생산해 왔으며, 셀 시험가동 발표 당시 모듈 누적 생산량은 53만7,000개였다. CATL은 헝가리에 전기차 생산시설을 둔 유럽 주요 완성차 업체들을 공급 대상으로 제시했다. 유럽 내 배터리 생산 기반을 확대하는 사업에 중국 기업의 자본과 제조기술이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CATL은 스페인에서도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양사는 사라고사에 최대 연산 50GWh 규모의 LFP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합작공장은 스텔란티스의 자동차 생산시설 인근에 들어서며, 양사가 각각 지분 절반을 보유한다. ACC를 통해 배터리 자체 조달을 추진했던 스텔란티스가 중국 업체와의 합작 생산도 병행하는 것이다. 유럽 완성차 업체들이 배터리 공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국 기업의 자본과 제조기술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지는 양상이다.
중국 업체들의 유럽 내 입지 확대는 실제 배터리 사용량에서도 확인된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유럽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은 180GWh로 전년 동기보다 29.6% 증가했다. 이 가운데 CATL 배터리 사용량은 80.5GWh로 30.3% 늘었으며, 점유율은 44.8%에 달했다. BYD와 SVOLT, CALB의 사용량도 각각 65.5%, 83.8%, 96.9% 증가하며 중국 업체들의 공급 기반이 넓어졌다. 특히 LFP 배터리 사용량은 33.6GWh로 109.7% 급증해 전체의 18.7%를 차지했다. 저가 전기차에 쓰이는 LFP 수요 확대가 해당 기술을 주력으로 육성해 온 중국 업체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