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MEMO] 유럽 반도체 전략의 승부처는 ‘대체 불가능성'
[AI MEMO] 유럽 반도체 전략의 승부처는 ‘대체 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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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확대만으론 한계, 유럽 반도체 전략 재설계 압박 ASML·전력반도체·연구 역량 중심 공급망 영향력 강화 자급자족 경쟁보다 핵심 병목 확보가 새 생존 전략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의 반도체 전략이 중대한 전환점에 놓였다. 유럽연합(EU)은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20% 달성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30년 유럽의 반도체 제조 부가가치 비중은 11.7%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목표와 현실의 간극이 커지면서 유럽 내부에서도 기존 전략의 실효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분위기다. 이제 유럽이 추구해야 할 것은 대만과 미국, 일본, 한국, 중국을 동시에 따라잡는 구상이 아니다. 핵심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유럽을 쉽게 대체하거나 배제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공급망의 핵심 병목 확보가 관건
유럽 반도체 전략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모든 종류의 반도체를 유럽 안에서 직접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유럽이 이미 경쟁력을 확보한 가치사슬 분야를 집중적으로 강화해 글로벌 공급망 내 영향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시각에 힘이 실린다.
반도체 산업은 설계 소프트웨어와 웨이퍼, 화학 소재, 광학 장비, 공장(팹), 패키징·테스트, 최종 수요 산업까지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가치사슬이다. 현재 이 전 과정을 단독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한국과 대만,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 반도체 강국들 역시 서로 다른 분야에서 긴밀한 상호 의존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 역시 공급망을 독자적으로 구축하기보다, 강점을 가진 분야를 중심으로 글로벌 네트워크 안에서 전략적 입지를 확대하는 방향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전략 전환론은 유럽 반도체법이 설계됐던 당시와 현재 시장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과도 맞물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공급망 마비로 자동차와 산업 생산 전반이 차질을 빚으면서 생산 시설 확대 자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에는 반도체 물량 확보와 생산능력 증설이 핵심 대응책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재 반도체 시장은 단순한 공급 부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의 보조금 경쟁, 국가 간 수출 통제, 대만 지정학 리스크, 인공지능(AI) 수요 확대가 동시에 시장 구조를 흔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 시설 확충만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접근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실제 영향력은 단순 생산 규모보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단기간 내 대체하기 어려운 핵심 기술과 병목 영역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 확대 속 더 커지는 유럽의 부담
시장 흐름도 이런 변화를 뒷받침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이미 사상 최고 수준으로 성장했으며, AI와 데이터센터, 고성능 메모리, 첨단 시스템 반도체 수요 확대에 힘입어 조만간 1조 달러(약 1,500조원) 규모에 근접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시장 확대가 곧 유럽의 기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요 반도체 강국들도 동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생산능력과 기술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전체가 빠르게 팽창할수록 기존 점유율을 유지하는 일조차 갈수록 어려워지는 구조다.
물론 유럽의 약점만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반도체 설계와 첨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서는 미국과 아시아 주요 국가들에 밀리고 있지만, 일부 핵심 분야에서는 여전히 강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장비인 만큼 글로벌 공급망에서 사실상 대체가 어렵다. 여기에 유럽은 기초 연구 역량과 자동차·산업용 전력반도체, 센서 분야에서도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전면적인 자급자족은 힘들더라도 글로벌 공급망 내 핵심 축으로 남을 수 있는 기반은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첨단 공정보다 중요한 공급망 지배력
이런 환경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유럽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핵심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핵심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유럽이 대체하기 어려운 위치를 확보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분야가 공급망 내 핵심 병목 구간에 해당하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동시에 유럽 기업과 연구 기관이 장기적인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또 그 경쟁력을 잃었을 때 유럽 산업과 반도체 안보가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도 필수 검토 과제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메이드 인 유럽’ 중심 전략의 한계도 뚜렷해진다. 유럽 핵심 산업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가 반드시 최첨단 미세 공정 제품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로봇, 에너지, 방산 산업에서는 초미세 공정보다 안정성과 내구성, 특정 용도에 최적화된 반도체 확보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전력반도체와 성숙 공정 기반 반도체는 유럽 제조업 전반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공급망 방어력이 곧 협상력
반도체 공급망은 단일 국가가 독자적으로 구축하기 어려울 만큼 비용 부담이 크고 구조도 복잡하다. 첨단 팹 하나를 운영하려면 수백억 유로 규모의 투자뿐 아니라 인력과 전력, 용수, 소재·부품 공급망, 안정적인 수요처까지 모두 갖춰져야 한다. 단순한 보조금만으로는 이런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공급망 의존 구조가 상호적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핵심 기술과 장비를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놓일 가능성이 크지만,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을 보유한 국가는 상호 의존 구조 속에서도 협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른바 ‘대체 불가능성을 통한 주권’ 전략이 힘을 얻는 이유다. 유럽이 첨단 장비와 신소재, 기초 연구 분야에서 핵심 거점을 유지할 경우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도 유럽을 공급망에서 쉽게 배제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향후 수출 통제와 국제 표준, 공급망 안정 논의 과정에서 유럽의 발언권을 높이는 확실한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실제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공급망 방어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핵심 병목 분야도 기술 유출이나 외부 압력, 사이버 공격에 취약할 경우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출 통제와 투자 심사, 사이버 보안 역량 강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정 기업 하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적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ASML은 유럽 반도체 산업의 핵심 자산이지만, 단일 기업만으로 유럽 전체의 전략적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광학 기술과 소프트웨어, 부품 공급업체, 숙련 인력 네트워크 등 ASML을 뒷받침하는 산업 생태계 전반을 함께 보호하고 육성하는 일이다.
여기에 유럽 반도체 기업 상당수가 중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기술 안보를 강화하면서도 글로벌 시장 접근성을 유지해야 하는 만큼, 공급망 안정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고려한 정교한 통상·외교 전략이 요구된다.
유럽 반도체 전략의 성패는 단순한 생산 점유율 확대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핵심은 위기 상황에서도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통제력과, 평상시 글로벌 공급망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유럽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핵심 영역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s Chip Strategy Should Build Power Through IIndispensable Chip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