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IPO 호황 속 美 승부수” 20년 만에 공시 규제 완화하는 SEC, 자본시장 활성화에 방점
“홍콩 IPO 호황 속 美 승부수” 20년 만에 공시 규제 완화하는 SEC, 자본시장 활성화에 방점
입력
수정
美 SEC 규제 완화 본격화, IPO 부흥 드라이브 가속 AI·반도체·배터리 자금 조달 허브로 부상한 홍콩 증시 견제 목적 미·중 자본시장 패권 경쟁 본격화, 글로벌 자금 흡인력 재편 예고

미국 금융당국이 신규 상장기업의 공시·감사 부담을 대폭 완화하는 개편안을 공개하며 기업공개(IPO) 시장 활성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 증시를 앞세워 자국 인공지능(AI), 반도체, 배터리 기업들의 글로벌 자금 조달 통로를 재편하는 가운데, 미국 역시 뉴욕 증시의 자금 흡인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전에 돌입한 모습이다.
폴 앳킨스 SEC 위원장 ‘미국 IPO 시장 부흥’ 선언
27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신규 상장기업이 일정 기간 강화된 공시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 개편안을 공개했다. 폴 앳킨스 SEC 위원장은 성명에서 “이번 규정 개편안은 상장기업 규제 체계를 전환하기 위한 중요한 첫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정책을 ‘미국 IPO 다시 위대하게(Make IPOs Great Again)’ 구상의 일환으로 설명했다.
개편안을 살펴보면 신규 상장기업은 최대 5년간 ‘대형 가속 공시기업(large accelerated filer)’ 규정 적용을 유예받을 수 있다. 현재 이 범주에 속한 기업은 강화된 재무 공시와 내부통제 검증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 SEC는 대형 가속 공시기업 기준이 되는 유통주식 시가총액(퍼블릭 플로트) 기준도 기존 7억 달러(약 1조원)에서 20억 달러(약 3조원)로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준 상향이 현실화될 경우 보다 많은 기업들이 간소화된 공시 체계 적용 대상에 편입될 전망이다.
특히 유예기간 동안 기업들은 재무보고 내부통제에 대한 외부 감사인의 인증(attestation)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유예기간이 끝난 뒤에는 대형 가속 공시기업에만 해당 의무가 적용될 예정이다. 또 시가총액 20억 달러 미만 기업들은 현재 소규모 기업에 한정된 축소 공시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에 따라 임원 보수 관련 주주투표 의무를 피하고 관련 공시 부담도 상당 부분 덜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아울러 SEC는 신규 상장사들이 IPO 직후 ‘선반 등록(shelf registration)’을 할 수 있도록 개편하기로 했다. 또 ‘무제한 선반 공모(unrestricted shelf offerings)’에 필요한 요건도 없앤다. 선반 등록은 자금 조달을 위한 증권 발행을 SEC에 사전 등록하는 것이다. 무제한 선반 공모는 종전엔 7,500만 달러(약 1,130억원) 규모의 유통 주식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번 조치는 시장 상황이 유리할 때 기업들이 보다 신속하게 증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SEC는 제도 개편이 시행되면 무제한 증권 발행이 가능한 기업 수가 현재보다 6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홍콩 IPO 규모, 나스닥 추월
미국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 움직임은 홍콩 IPO 시장의 급격한 회복세와 맞물려 있다. 지난해부터 홍콩 증시는 중국 AI·반도체·전기차 밸류체인 기업들의 핵심 상장 창구로 다시 부상했고, 글로벌 기관자금도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업체 딜로직과 LSEG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홍콩 증시의 1·2차 주식 발행 규모는 132억6,000만 달러(약 20조원)로, 2021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이 기간 전 세계적으로 400억 달러(약 60조원)의 자금이 조달된 가운데, 홍콩 증시의 IPO 규모는 나스닥, 뉴욕증권거래소(NYSE), 인도 뭄바이증권거래소(BSE) 등을 크게 제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분기 홍콩 증시에 신규 상장한 38개사에는 반도체 설계 업체 상하이톈수즈신과 아이신위안즈 등이 포함돼 있으며, 이들 기업은 총 8억 달러(약 1조2,000억원) 이상을 조달했다. 이 밖에도 농업 기업 무위안식품, 편의점 체인 '비지밍(Busy Ming)' 등 다양한 업종 업체도 상장했다. 현재 홍콩 증시에는 400개 이상 기업이 상장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IPO 시장의 부활은 단순한 유동성 반등으로 보기 어렵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홍콩 증시는 중국 하드테크 산업의 사실상 유일한 글로벌 자금 조달 창구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AI·배터리 기업들에 대한 금융·기술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과거 뉴욕 증시를 통해 달러 자금을 흡수하던 중국 기업들의 자금 조달 경로가 급격히 위축됐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이 공백을 홍콩을 통해 메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홍콩은 중국 통제권 안에 있으면서도 국제 금융 시스템과 연결된 사실상 유일한 역외 시장이다. 중국 본토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의 직접적인 규제와 감시를 상대적으로 피해가면서 글로벌 기관투자자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핵심 통로인 셈이다. 최근 배터리 제조 기업 CATL이나, 의약 제조 기업 항서제약 등 중국 대표 기업들이 잇따라 홍콩 증시에서 2차 상장에 나선 배경에도 이러한 정책적 의도가 깔려 있다. 기업 차원의 자금 조달 수요보다 전략 산업 육성을 위해 중국 정부가 홍콩 시장을 자금줄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중국 정부는 동시에 본토 유동성을 홍콩으로 흘려보내는 ‘남향자금’ 정책도 강화하고 있다. 강구통(중국 본토 투자자들의 홍콩 시장 투자)을 통해 중국 본토 투자자들이 홍콩 주식을 매수할 수 있도록 연결한 뒤, 시장 침체 국면마다 규제 완화와 유동성 공급을 병행하는 방식이다. 실제 지난해 홍콩 증시로 유입된 남향자금 규모는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글로벌 투자자의 대규모 자금 이탈에도 불구하고 홍콩 증시가 급격한 붕괴를 피할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정책성 자금 공급과 본토 자금 동원 전략 덕분이었다.

中은 레드칩 손질 착수, 美는 시장 감시 의존
다만 중국 역시 홍콩 시장을 무제한 개방하는 방식으로 자금 유입만 확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는 최근 일부 기업에 홍콩 상장을 추진하려면 이른바 '레드칩(red chip)' 구조로 불리는 해외 지주회사 체계부터 정리하라는 취지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기업에는 기존 레드칩 구조를 손본 뒤 해외 지주회사 대신 중국 내 법인을 앞세운 'H주' 방식으로 상장을 추진하라는 요구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규제 대상으로 거론되는 레드칩은 중국 기업이나 창업자가 케이맨제도 등 해외에 지주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를 상장 주체로 삼아 중국 내 사업회사를 지배하는 구조를 말한다. 중국 본토 법인이 직접 상장하는 대신 해외 법인을 앞세워 외자를 유치하고 홍콩 증시에 오를 수 있어 그동안 기술기업과 소비재 기업, 달러펀드가 널리 써온 방식이다. 투자와 회수 측면에서는 편리하지만, 중국 당국 입장에선 지배구조와 자금 흐름을 관리하기 까다로운 구조로 여겨져 왔다.
시장은 이번 조치를 당국의 일회성 기강 잡기로만 보지 않는 분위기다. 중국 당국이 특히 들여다보는 대상이 본래 외국인 투자 유치나 규제 업종 대응을 위해 만들어진 전통적 레드칩보다, 홍콩 상장을 쉽게 하기 위해 새로 구조를 짠 '신형 레드칩'이라는 점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일부 기업에 H주 방식 상장을 사실상 유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홍콩 IPO 시장이 회복되더라도 모든 중국 기업에 상장 기회가 똑같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 내 법인을 앞세운 기업은 상대적으로 길이 열려 있지만, 해외 지주회사를 상장 주체로 둔 기업은 상장 준비 단계부터 다시 구조를 점검받아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시장 내부의 자율적 감시 움직임이 활발한 미국 자본시장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미국에서는 탐사 언론이나 공매도 리서치, 행동주의 헤지펀드, 기관투자자들이 기업의 사업모델과 회계 구조, 기술력, 성장 전망 등을 지속적으로 검증하며 시장 내부의 압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공매도 전문 헤지펀드 힌덴버그 리서치가 대표적인 예다. 힌덴버그 리서치는 수소 전기트럭 제조업체 니콜라의 수소트럭 기술 과장 논란과 인도의 거대 인프라 기업 아다니그룹 회계 의혹 등을 연이어 폭로하며 글로벌 시장에 충격을 줬고, 이는 실제 규제당국 조사와 시가총액 급락으로 이어졌다. 미국 자본시장이 규제기관의 사전 차단보다 시장 내부의 검증 메커니즘을 통해 거품과 부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들이다. 지난해 1월 힌덴버그 리서치가 '피로 누적'을 이유로 폐업한 것을 두고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회장은 “시장에 대한 큰 손실”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결국 SEC의 이번 규제 완화 역시 미국 자본시장의 이러한 시장 기반 검증 구조를 전제로 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월가 내부에서 과열된 기업가치와 부실 기업을 지속적으로 걸러내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미 금융당국이 일정 수준의 규제 완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한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중국은 정부와 거래소가 직접 IPO 시장을 통제하는 구조지만, 미국은 시장 내부에서 기업가치 검증과 거품 제거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해 온 측면이 있다”며 “SEC 역시 이런 시장 구조를 일정 부분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