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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테크] 공급망 회복력의 착시, 안보 비용으로 돌아온 통상 전략

[딥테크] 공급망 회복력의 착시, 안보 비용으로 돌아온 통상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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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2 w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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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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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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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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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확대・생산 이전은 다른 경로
재배치・재경로화 구분이 정책 방향 결정
공급망 안정 핵심, 효율보다 의존성 관리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급망 회복력은 더 이상 기업 차원의 효율성 문제에 머물지 않고, 국가 안보와 재정 부담이 결합된 정책 의제로 이동하고 있다. 2018년부터 2024년까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미국이 수입하는 특정 제조업 제품의 비중은 두 배로 확대됐지만, 같은 기간 자국 내 부가가치 생산 능력이 함께 증가한 국가는 제한적이었다. 이는 공급망 재편이 반드시 생산의 이전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수출 증가가 단순한 경유 물량 확대에 그칠 경우, 산업 역량과 고용, 세수 기반은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어렵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상품 이동이 단순한 재경로화인지, 아니면 실제 생산 재배치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통상·산업 정책은 기대한 효과를 내기 힘들다. 공급망을 안보 전략의 일부로 다루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의 증가 여부가 아니라, 그 수치가 반영하는 경제적 실체다.

재배치와 재경로화 차이

수출 증가가 산업 재배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역 재배치(trade reallocation)는 생산 활동이 실제로 이동하며 국내 산업 구조에 변화가 나타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공장 신설과 설비 확충이 진행되고, 지역 공급업체의 참여 범위가 넓어지며, 임금과 숙련도 상승이 동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수출 단위당 국내 부가가치 증가, 생산 공정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확대, 지역 산업과의 연계 강화로 확인된다. 시간이 지나면 중간재 수입 의존도가 낮아지고, 생산성과 고용의 안정성이 함께 개선되는 경향을 보인다.

무역 재경로화(trade rerouting)는 성격이 다르다. 상품이나 부품은 기존 생산국에서 제조된 뒤 관세·쿼터 회피나 규정 활용을 목적으로 제3국을 경유해 이동한다. 이 경우 총수출 수치는 확대되지만, 국내에서 창출되는 부가가치는 제한적이다. 증가하는 활동은 주로 물류, 통관, 재포장과 같은 보조적 영역에 집중되고, 제조업 고용이나 세수 기반, 공급망의 구조적 안정성은 크게 강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재배치와 재경로화는 경제적 효과와 정책 대응이 근본적으로 엇갈린다. 수출 증가의 성격을 구분하지 못하면 통상 성과를 산업 역량 강화로 오인할 위험이 커지고, 산업·통상 정책의 방향 설정도 왜곡될 수 있다.

숫자가 보여주는 재고와 취약성

이 구분이 흐려질수록 비용은 재고 증가와 취약성 확대로 나타난다. 조달 다변화가 진행돼도 충격이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기업과 국가가 재고를 추가로 쌓는 선택을 하게 되고, 이는 효율 회복보다 위험 완충에 초점을 둔 대응으로 이어진다. 실제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ntre for Economic Policy Research, CEPR) 분석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데이터에 따르면, 산업 전반에서 조달 다변화가 확대될수록 재고 대비 매출 비율은 낮아지기보다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이 확인됐다.

조달 다변화와 재고 축적의 동반 확대
주:산업 전반에서 조달처 다변화가 확대될수록 투입 재고 비율도 함께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지속적인 공급 차질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재고는 다변화를 보완하는 추가 안전판으로 기능하고, 기업은 병목 위험을 흡수하기 위해 자금을 재고에 묶어두는 선택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공급망의 외형은 넓어질 수 있지만, 핵심 중간재에 대한 의존이 해소되지 않으면 구조적 취약성은 그대로 남는다.

결국 수치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급선을 늘리는 것만으로 안정성이 자동 확보되지는 않으며, 의존성의 성격을 관리하지 못할 경우 재고 부담과 국가 차원의 위험은 함께 커진다.

동남아 6개국이 보여준 엇갈린 경로

이 차이는 동남아 6개국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트남은 전자제품 수출과 위탁 제조 투자가 빠르게 늘었지만, 일부 영역에서는 생산 재배치가 진행되는 동시에 중국산 부품 의존도가 높은 저부가가치 재경로화가 함께 나타난다. 수출 증가의 성격이 산업별로 갈리며 정책 설계의 정밀도가 요구되는 이유다.

인도네시아는 팜유와 광물 같은 강한 수출 기반을 바탕으로 가공 산업과 일부 전자 조립에서 재배치 가능성을 보인다. 다만 전자·고부가가치 제조업의 성과는 보호 정책과 현지화 규정의 설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태국은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현지화된 공급망과 외국인 투자 공장이 결합돼 재배치 효과가 비교적 뚜렷하다. 반면 말레이시아의 반도체·전자 수출은 시험·패키징 등 제한된 공정 비중이 높아, 총수출 증가에도 국내 부가가치 확대는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필리핀은 전자 조립과 비즈니스 서비스의 결합이 관건으로, 공급업체 연계와 숙련도 향상이 성과를 좌우한다. 싱가포르는 물류·금융·재수출을 중심으로 한 고부가 서비스 허브로 기능하며, 제조업 이전보다는 가치사슬 서비스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별 경로가 갈리는 상황에서 총수출 규모만으로 발전 단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수출의 구성과 국내 부가가치의 축적 여부를 함께 보지 않으면 정책 판단은 쉽게 빗나간다.

무역 취약성의 집중, 일부 중간재에 쏠린 위험
주: 소수의 중간재가 전체 무역 취약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구조가 확인된다.

증거에 기반한 정책 전환

정책 대응은 현재의 무역 구조가 재배치인지 재경로화인지를 먼저 가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재배치가 진행 중인 국가는 산업 역량이 실제로 축적되는 단계에 들어선 만큼, 기술 교육과 직업 훈련을 강화하고 전력·교통·통관 같은 기반 인프라의 병목을 해소해 장기 성장을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지역 공급업체의 참여를 넓히고, 생산 공정과 연계된 투자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반대로 재경로화가 중심인 국가는 전략의 초점을 조정해야 한다. 통관 절차의 투명성 강화, 원산지 규정 집행, 물류·표준 인증과 같은 서비스 부문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향이 현실적인 선택지다. 경유 무역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교육과 인프라 투자로 연결하지 못하면 산업 구조의 전환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이런 판단 기준을 분명히 하라는 메시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엔무역개발회의(UN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세계은행(World Bank) 보고서에서도 반복된다. 이들 기관은 총수출 증가보다 국내 부가가치의 축적과 공급망 연결성의 강화를 정책 성과의 핵심 지표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정책의 성패는 송장 규모 확대가 아니라, 실제 일자리 창출과 실제 산업 역량 형성으로 이어졌는지에 달려 있다. 증거에 기반한 진단 없이 수출 수치만을 따라갈 경우, 통상 전략과 산업 정책의 괴리는 더 커질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en Supply Chain Resilience Becomes a National Security Cost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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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