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안보의 가격표, 유럽 정치와 재정의 균형 시험
[딥폴리시] 안보의 가격표, 유럽 정치와 재정의 균형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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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위협 인식, 국방 지출·정치 결속 동시에 끌어올리는 흐름 공동 방위 확대 속 재정 긴축·투자 부담이 만나는 지점 국방 강화 지속성을 좌우하는 것, 규모가 아닌 설계 방식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 12월 기준, 유럽인의 3분의 2 이상은 각국이 단독으로 러시아와의 정면 충돌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판단은 단순한 여론을 넘어 정치적 우선순위를 재편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변화는 빠르게 나타났다. 국방비를 축소해오던 국가들은 증액으로 방향을 틀었고, 갈등을 반복하던 정치권 역시 방어 역량 강화라는 목표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정책 논쟁의 중심도 복지와 재정에서 안보와 대비로 옮겨가고 있다.
이 변화의 출발점은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전쟁이 촉발한 위기의식은 특정 국가에 머물지 않고 유럽 전반으로 확산됐으며, 안보에 대한 불안은 국경을 넘어 정치 판단의 공통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겉으로는 군사 정책의 조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무엇을 우선 보호해야 하는지를 다시 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국방비 증액은 이제 예산 항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제도의 우선순서를 재배치하는 정치적 선택으로 굳어지고 있다.
위협 인식이 정치 지형을 단순화
외부 위협은 사회 내부의 갈등을 빠르게 줄이고, 권력을 방어 역량을 약속하는 방향으로 집중시킨다. 위험이 분명해질수록 유권자는 질서와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주체를 신뢰하게 되고, 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 세력이나 기관은 영향력이 약화된다. 위기 국면에서 반복적으로 관측되는 결집 효과(rally effect)다. 이 현상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러시아 사례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정부 지지율은 상승했고, 해외 이주를 희망하는 비율은 눈에 띄게 줄었으며, 서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한층 강화됐다. 이는 사회 구성원 간의 자발적 화합이라기보다, 외부 위협에 대응하는 집단적 반응에 가깝다. 여기에 언론 통제와 반대자 처벌이 더해지며 결집은 구조적으로 고착됐다.
핵심은 단순하다. 외부 위협은 정치의 작동 방식을 바꾼다. 다만 이 효과는 어디서나 자동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결집은 발생하지만, 조건이 따른다. 위협이 가깝고 명확하며 장기화될 가능성이 클수록 효과는 커진다. 사람들은 불안을 실제 보호로 전환할 수 있는 조직을 따른다. 역사적으로도 외부의 적은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흐름은 이제 발트 3국에서 스페인까지, 유럽 전반의 정치 환경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주: 2023년 기준 EU 회원국들의 국방비는 국가별 편차가 크지만 전반적으로 증가 흐름을 보이며, 전선 국가일수록 자본 지출 비중과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미국은 국방비가 GDP의 3%를 안정적으로 상회해, 방위비 확대가 일시적 대응이 아닌 구조적 전환 단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가 보여준 단결의 조건
이 같은 결집 방식이 실제로 작동한 사례는 우크라이나에서 확인된다. 2024년 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인의 90% 이상이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답했다. 과거 지역별로 뚜렷했던 정체성 격차도 크게 줄었다. 일상 언어와 언론, 공공 서비스 전반에서 우크라이나어 사용이 빠르게 늘었고, 이는 사회 전반의 변화로 이어졌다. 2014년 이후 진행돼 온 정체성 강화 흐름이 전쟁이라는 외부 충격을 계기로 한층 가속화된 결과다.
전쟁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는 신호도 감지된다. 2025년 일부 조사에서는 협상에 대한 선호가 이전보다 확대됐다. 그러나 다수의 우크라이나인은 협상의 전제로 서방의 확실한 안보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단결은 감정적 구호에서 나오지 않는다. 실제 보호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 유지된다.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나타난 결속은 바로 이 조건 위에서 형성됐다.
이 경험은 교육과 행정 영역에도 직접적인 함의를 남겼다. 우크라이나의 학교와 대학은 위협이 장기화된다는 전제 아래 운영 계획을 재정비했다. 민방위 훈련을 확대하고, 예비 시험 장소를 마련했으며, 온라인 수업 체계를 상시 운영 가능한 구조로 전환했다. 학교가 보호되면 교육은 이어진다. 반대로 안전이 흔들리면 교육의 내용과 성과는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정치 지도자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실제 방어 능력을 보여줄 때 사회적 결속은 유지되고, 신뢰는 제도로 굳어진다.
유럽 전반으로 확산된 국방 전환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위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에 따르면 2014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2% 기준을 충족한 회원국이 3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5년에는 모든 회원국이 이 기준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조달 방식과 생산 계획 자체를 바꾸는 실질적 약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도 방향을 분명히 틀었다. 과거와 달리 방산 공장에 직접 자금을 투입하며 생산 기반을 키우고 있다. 탄약 생산 지원법(Act in Support of Ammunition Production)은 2025년 말까지 155mm 포탄을 연간 200만 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목표는 화약·폭약 생산부터 탄약 조립까지 방산 산업 전반에 명확한 투자 신호를 제공했고, 공급 능력 확대를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변화는 군사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럽 전역에서 사보타주, 방화, 사이버 공격이 증가하면서 경찰과 정보기관 간 협력은 한층 강화됐다. 여론의 방향도 달라졌다. 전쟁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EU 차원의 공동 방위 정책에 대한 지지는 확대되고 있다. “각국이 혼자서는 방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방위 자원 공유와 비축, 비상 대응 훈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이 흐름은 병역 제도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덴마크는 여성까지 의무 징병 대상에 포함했고, 라트비아는 중단했던 징병제를 다시 도입했다. 스웨덴은 징집 인원과 수행 임무를 확대했으며, 독일은 자발적 복무 제도를 시작한 뒤 필요할 경우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곧바로 전쟁 준비가 완성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전후 평화에 익숙했던 유럽이 안보를 전제로 한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주: 유로지역 재정 기조는 2025년에는 소폭 완화 국면에 있으나, 2027~2028년에는 재정 통합·긴축 기조가 크게 강화되는 흐름을 보인다. 국방비 확대가 본격 반영되는 시기와 겹치면서, 재정 여력 축소와 민간 투자 위축 위험이 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방 강화 비용을 관리하는 방법
문제의 핵심은 비용이다. 국방비 증액은 재정과 곧바로 맞물린다.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은 2025년 금융안정성 보고서(Financial Stability Review)에서 유로존의 재정 기조가 2025년의 완만한 완화 국면에서 2027~2028년 강한 긴축 국면으로 전환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구간에서 국방 지출 부담이 본격적으로 반영된다. 대응 장치가 부족하면 민간 투자 위축 위험은 확대된다.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과 유로스타트(Eurostat) 자료도 정부 부채 부담이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2010년 그리스 재정 위기의 재현을 피하려면 재정 균형 회복과 차환 위험 관리가 정책의 출발선이 된다.
해법은 지출의 방향과 방식에 있다. 단기 확대보다 장기 계약, 공동 표준, 공동 발주를 통해 방산 산업이 예측 가능한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접근이 필요하다. EU의 탄약 생산 계획은 그 사례다. 이 방식은 비용 통제와 공급 능력 확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교육과 공공 인프라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학교의 예비 전력과 보안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수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교사를 훈련해야 한다. 이는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투자다.
유럽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도 분명하다. 초점은 공격이 아닌 방어에 맞춰져 있다. 2025년에도 우크라이나가 강조한 요구는 전쟁의 확대가 아니라 확실한 안보 보장이었다. 국방 강화는 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도가 준비돼 있다는 확신이 쌓일수록 사회적 단결은 유지되고, 민주주의의 기반도 함께 강화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Price of Security: European Defence Spending and the Debt Squeez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