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다움’ 잃고 종속의 길 가나, 트럼프 공세에 분열되는 ‘약한 유럽’
‘유럽다움’ 잃고 종속의 길 가나, 트럼프 공세에 분열되는 ‘약한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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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는 ‘침묵’, 독일 등은 직소통 모색 그린딜 규제 함정에 빠진 유럽 산업 경쟁력 강대국 사이 결정권 상실 현실화, 전략 자율성도 후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럽연합(EU)을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한 집단이자, 미국의 국익을 갉아먹는 경쟁 세력으로 규정한 가운데, 미국에 대한 대응을 놓고 회원국 간 이견이 갈리고 있다. 일부는 정면 대응을, 일부는 미국 붙잡기를 우선순위에 두며 단일 대미 전략을 흔드는 양상이다. 이는 유럽의 권력 공백과 전략적 취약성을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평가다. 현재 유럽은 성급한 유로화 도입과 비현실적 환경정책이 초래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로, 지정학적 위기와 경제적 쇠퇴 속에서 미래를 결정할 힘마저 잃어가는 실존적 기로에 서 있다.
EU 지도부, 트럼프 "유럽 나약·쇠퇴" 비방에 내분
15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EU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후, EU 집행부 내부는 물론 회원국 간에도 갈등이 커지고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 발표한 새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미국의 오랜 동맹인 유럽이 “문명의 소멸이라는 엄혹한 전망”을 맞고 있다고 명시했다. 유럽이 고유의 가치를 잃은 채 그릇된 길로 가고 있으므로 현 궤도를 수정할 수 있도록 미국이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개방적 이민 정책과 과도한 규제 등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가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존재감도 미미한(unrecognizable)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시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리는 유럽이 유럽적인 상태로 남길 원한다”면서 문명적 자긍심을 회복하고 실패한 숨 막히는 규제를 철폐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 추세가 지속할 경우 유럽이 신뢰할 만한 동맹국으로 남을지 불확실하다고도 했다.
미국의 이 같은 공세는 EU의 디지털 규제, 지속가능성 법안, 이민 정책 등에 대한 불만과 맞물려 EU 집행위원회 내부에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대응 방식을 두고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대응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이 우크라이나와의 협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게 트럼프에 대한 공개 비판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EU의 미온적 대응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일부 회원국들은 브뤼셀을 우회해 미국과 직접 접촉하기를 원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EU 공식 기구들과 관계를 맺기 어렵다면 독일과 같은 개별 국가들이 협력 창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 EU 고위 인사는 “여러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 현안을 직접 논의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짚었다. 당초 EU는 미국과 △무역협정 △나토 분담금 확대 △우크라이나 군수물자 공급 등 세 가지 사안을 각각 협상한다고 봤지만, 한 회원국 정상은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며 “사실상 하나의 협상, 즉 미국을 유럽에 붙잡아두는 협상일 뿐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비판을 수용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지난 6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도하 포럼(Doha Forum)’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비판 중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며 “미국은 여전히 유럽의 가장 큰 동맹”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극우 진영의 유력 대선 주자인 조르당 바르델라 국민연합(RN) 대표도 트럼프 행정부 주장에 동조했다. 그는 지난 10일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량 이민 및 지난 30년간 이주 정책 등에 대한 각국 정부의 소홀함이 유럽 국가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경쟁력 상실 속 산업 공동화 심화
실제 유럽의 구조적 약화는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발표한 'EU 경쟁력의 미래(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보고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드라기 총재는 유럽이 동맹임에도 미국의 요구에 굴복했고, 심지어 방위비 증액마저 자율적 선택이 아닌 외부 강요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지난 8월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유럽이 아예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 현실을 ‘치욕적’이라고 표현하며 유럽이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결정의 대상이 돼버렸다는 점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영국의 싱크탱크 국제통화금융기관포럼(OMFIF)과 블룸버그 역시 “유럽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미국과 러시아”라며 같은 진단을 내놨다.
EU가 ‘세계의 모범’을 자처하며 밀어붙이고 있는 그린딜(Green Deal) 정책도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린딜 정책에 따라 2030년부터 가정용 배출권 거래제(Emission Trading System, ETS)가 시행되면 일반 가정은 연간 수십만원대 추가 부담을 지게 되지만, 기후 변화에 미치는 효과는 0.003도(°C) 감소라는 미미한 수치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이미 나와 있다.
더군다나 EU 지도부가 내세우는 환경 규제는 유럽 기업들을 미국 기업들보다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 유럽의 많은 유관 기업들은 포춘 글로벌 500(Fortune Global 500) 명단에서 제외됐고, 2000년 30%에 달했던 유럽의 글로벌 알루미늄 생산 비중도 최근 5%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EU는 그린딜 정책을 전 세계적 모범 사례라고 주장하지만, 성장과 공급망, 산업 경쟁력이라는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주요 경제권은 유럽을 따를 의사가 없는 분위기다. 유럽의 군사력과 외교력 모두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지정학적 문제도 유럽의 후퇴를 가속하고 있다. 최근 유럽은 두 개의 주요 전쟁이 주변 지역에서 벌어지면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의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으로,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까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는 유럽에 중요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의 급등과 함께 공급망 붕괴를 초래했다. 난민 문제도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유럽으로 피란을 떠났다. 이 같은 난민 유입은 유럽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며 사회적 및 정치적 불안정을 촉진시켰다.
독일 통일과 유로화 조기 도입, 유럽 경제 취약성 확대
유럽 주요 언론들은 유럽 쇠락의 기원을 1990년대 초 독일 통일에서 찾는다. 급격한 통일 과정에서 동독 지역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독일 중앙은행은 이를 진화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이 충격은 1992년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 공격으로 표출됐고, 결국 영국이 유럽환율기구(ERM)에서 이탈하면서 초기 통합 실험의 균열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프랑스와 독일은 유로화 출범을 강행했다. 독일은 통일의 대가로, 프랑스는 독일 견제를 위한 전략으로 통화 통합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재정 통합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입된 유로화는 구조적 불완전성을 안고 있었고, 그리스 위기와 같은 재정 혼란을 유발했다. 이에 대해 존 오서스 FT 논설위원은 “유로존은 시작부터 불완전한 상태였으며, 지금까지도 미완성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EU는 외형상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회원국 간 격차와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통화·재정 정책의 불일치, 군사력 부재, 환경 정책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약한 유럽’을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럽이 스스로의 환상에 사로잡혀 강대국 행세를 하지만, 결정권은 사실상 미국과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의 쇠퇴를 ‘자멸적 통합의 결과’라 평가한다. 독일 통일의 속도전, 유로화의 조기 출범, 녹색 이념에 경도된 정책 추진이 각각 단발성 선택에 그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유럽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논리다. 실제로 통합은 확대됐지만 조정 능력은 강화되지 않았고, 규범은 강화됐지만 힘의 기반은 축소됐으며, 이상은 고도화됐지만 현실 대응력은 저하됐다. 그 결과 유럽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종속적인 위치로 밀려나,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힘조차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