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협상] “집단 안보 시스템 수명 다했나” 나토 탈퇴 경고한 미국, ‘80년 평화 종말’ 코앞
[종전 협상] “집단 안보 시스템 수명 다했나” 나토 탈퇴 경고한 미국, ‘80년 평화 종말’ 코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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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란 전쟁 속 나토 탈퇴 예고 유럽 군비 경쟁 가속화 위험 글로벌 연쇄 효과 우려 확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의 전쟁을 계기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체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세계 최대의 집단방위 체제인 나토의 유럽 동맹국들이 정작 미국이 필요로 할 때 뒷짐만 지고 있다며 연일 후폭풍을 예고하는 모양새다. 이 같은 균열은 국제질서를 지탱해 온 안보 구조의 약화를 의미한다. 국제사회가 2차 대전 이후 80년간 누려온 긴 평화가 끝자락에 다가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유럽 안보 동맹 균열
31일(이하 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루비오 장관은 전날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이란 전쟁 과정에서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을 사실상 거부한 나토에 대해 “매우 실망스러웠다”며 “미국은 이번 작전이 끝난 뒤 이 모든 것을 재검토(reexamine)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루비오 장관은 “나토가 미국에 이익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만일의 사태 때 주둔권(basing rights)을 주기 때문”이라며 “이는 우리가 보통 때 기지가 없는 유럽의 많은 지역을 포함해 세계 각 지역에 병력과 항공기, 무기를 배치할 수 있게 해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나토 동맹국인 스페인이 이란과의 전쟁에 참전한 미군 항공기의 영공 진입을 막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루비오 장관은 “스페인의 좌파 지도자들이 자국의 영공을 차단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앞서 마르가리타 로블레스 스페인 국방장관은 30일 미군의 (스페인 내) 기지 사용은 허용되지 않으며, 이란과의 전쟁을 위한 스페인 영공 이용도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또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모론과 로타에 있는 미군 공동기지 사용을 불허한다는 점을 미국 쪽에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루비오 장관은 “만약 나토가 유럽이 공격받을 때 우리가 방어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우리가 필요로 할 때 기지 사용권 등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좋은 체제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나토는 동맹이고 동맹은 상호이익이 돼야 하고, 일방통행 길이 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루비오 장관의 이날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와도 맞닿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부 펀드가 주최한 퓨처 인베스트먼트 이니셔티브(FII) 행사에 참석해 “우리는 언제나 그들 곁에 있어줬겠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나토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은 엄청난 실수였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는 매년 수천억 달러를 나토에 지출하고 있다”며 “그들이 우리를 위해 나서지 않는데 우리가 왜 그들을 위해 나서야 하느냐. 그들은 우리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실제 상당수 유럽 국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 작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나토가 트럼프 대통령의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에 난색을 표한 데 이어 이탈리아도 미국이 이란과 전쟁 중 시칠리아 공군기지를 사용하는 방안을 거부했다. 폴란드 역시 자국에 있는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을 중동에 보내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으며, 프랑스도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이란 전쟁에 사용될 미국 무기를 수송하려는 이스라엘에 자국 영공을 불허했다. 미군이 중동에서 무기 재고 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잇따라 자극한 것이다.

‘돈로주의’ 강화 명분
현재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은 유럽 국가들의 행위를 명백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돈로독트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명분으로 활용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따 '돈로주의'라고도 불리는 신먼로주의는 1800년대 유럽 갈등에 대한 개입을 자제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국익에 집중하는 고립주의를 표방했던 먼로주의의 확장·개정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하는 외교 노선은 기존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유지 전략과는 명확히 결을 달리한다. 이 같은 기조는 나토의 존립 목적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동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 시기 구(舊)소련의 침공과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된 집단 방위 체계는 당시 지정학적 환경에서 핵심적 기능을 수행했다. 한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모든 회원국이 대응하는 집단방위 조항(헌장 제5조)이 핵심이다.
다만 최근 국제질서와 관련된 불확실성이 특히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파악하기 극히 어렵다는 데 기인한다.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차단처럼 개별 사안의 심각성이 크다는 점은 물론이고 향후 미국 정책의 방향성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리스크를 키우는 상황이다.
미국이 올해 초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돈로독트린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란 공습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는 경고가 되고 있다. 이란 전쟁은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드파워(군사력·경제력 등 강제적 수단)를 노골적으로 투사하는 개입주의적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적 부담이 크다면서 유럽 국가들의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로 올리도록 압박한 동시에,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는 우크라이나 지원도 유럽을 통한 '무기 판매' 방식으로 바꿔놨다. 나토 회원국에 대한 방위비 압박과 별개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고율의 관세 부과에 이어 덴마크령 그린란드 병합 시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보복성 관세 위협을 받기도 했다.
결국 유럽 국가들이 이란 전쟁에 소극적인 것은 나토의 핵심인 제5조가 이번 전쟁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명분론과 함께, 동맹국들에 가혹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이 유럽 내 반감을 자극한 결과일 수도 있다. 또 2월 28일 대이란 공격 개시 직전까지 나토 동맹국들의 작전 동참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은 것도 유럽의 냉담한 반응과 무관치 않다는 게 외교가 중론이다. 돈로독트린이 미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던 대서양 동맹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는 셈이다.
세계 각국, ‘전시 체제’ 대비
문제는 나토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전 세계를 다시 '힘의 논리' 국면으로 치닫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는 30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번 사태가 국제 안보 체제에 구조적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핵심 변수로 미국의 핵 확장 억지 신뢰도를 지목했다. 그동안 미국에 의존해 온 동맹국들 사이에 미국이 유사시 즉각적인 방어에 나설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고 유럽의 방위비 분담을 압박하는 발언을 이어가면서 '미국 없는 안보'가 현실적 시나리오로 거론되고 있다. 유럽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방위비를 공격적으로 늘려 왔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유럽 대륙의 군사비 지출은 6,930억 달러(약 1,046조원)를 기록했다. 이는 소련 붕괴 후 가장 높은 수준이며, 냉전 말기인 1990년 6,160억 달러(약 929조5,000억원)의 113%에 달한다.
2024년 한 해 동안 유럽에서는 지중해 섬나라 몰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가 국방비를 증액했다. 특히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는 2023년보다 31% 증가한 380억 달러(약 57조3,000억원)를 국방비로 집행했다. 이는 폴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2%에 이른다. 러시아와 인접한 또 다른 유럽 국가들인 스웨덴(34%), 노르웨이(17%), 핀란드(16%) 등도 국방비를 대폭 늘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 대국화를 억제해 왔던 독일은 885억 달러(약 133조5,000억원)를 국방비로 지출했다. 미국·중국·러시아에 이은 세계 4위 수준이다. 이보다 1년 전인 2023년 독일의 국방비 지출 순위는 세계 7위(600억~700억 달러)였다. 불과 1년 사이 세 계단이나 상승한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독일 연방의회 예산위원회가 물류 조달 및 전투차량 확보, 정찰 감시위성 체계 등 방산 인프라에 500억 유로(약 85조2,760억원)가 넘는 국방조달계약을 한꺼번에 승인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핵 억지 구상도 본격화됐다. 지난달 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핵탄두 증강과 유럽 동맹과의 핵 억지 협력을 포함한 새로운 핵전략을 발표했다. 핵무기 보유량을 현재의 290기에서 더 늘리겠다는 것이 골자다. 그간 프랑스가 ‘엄격한 충분성’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핵탄두만 보유한 것을 고려하면 극적인 정책 변화다. 마크롱 대통령은 핵무장 강화 외에도 ‘전방 억지’라는 새로운 협력 구상도 발표했다. 이 구상엔 독일, 그리스, 스웨덴 등 유럽 내 핵을 가지고 있지 않은 7개 국가가 참여한다.
군사적 긴장 고조에 따른 군비 경쟁은 아시아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말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평화는 협의가 아닌 실력에 기대야 한다"고 했다. 앞서 라이 총통은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중국의 군사력 증강 및 도발로 역내 평화가 흔들리고 있다며 2026년에 400억 달러(약 60조3,000억원) 규모의 국방비를 추가 편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은 고조되는 동북아 긴장 속에서 방위력 강화를 지지하는 높은 여론을 바탕으로 그간 무기 수출을 제한해 온 일부 규정을 철폐하는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초 일본 정부와 여당은 구난, 수송, 경계, 감시, 소해(기뢰 제거) 등 5가지 용도로 사용될 경우에만 방위 장비 완성품을 수출할 수 있다는 규정을 올해 내 없애는 방안을 조율했다. 대만과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은 중국의 군사적 부상에 따른 불안감이 역내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 세계에서 분쟁과 재무장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류가 장기간 누려 온 평화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클린턴 전 행정부 시절 미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2차 대전 종전 후 약 80년 동안 이어진 강대국 간 전쟁의 부재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성취였지만, 이제 그 기반이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다고 짚었다. 냉전기 미·소 간 상호확증파괴(MAD)를 피하기 위한 억지력,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중심으로 한 핵 비확산 체제를 통해 국제사회가 유지해 온 '긴 평화'가 더 지속될 것이라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