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서버가 빨아들인 메모리, HBM 쏠림에 소비자용 D램 공급 급격한 축소
AI 서버가 빨아들인 메모리, HBM 쏠림에 소비자용 D램 공급 급격한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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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경쟁 속 D램, 상대적 후순위로
엔비디아에 집중된 공급망 주도권
범용 D램 가격 사이클 변동 가능성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이 격화되면서 메모리 산업의 중심축도 빠르게 이동하는 흐름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업체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스마트폰·PC에 쓰이는 범용 D램 공급은 크게 줄었다. 이에 메모리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이 동시에 나타나는 모양새다. AI 서버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 중심 공급망에서 HBM 기술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메모리 기업들은 향후 D램 시황 변동 가능성까지 고려해 생산 전략을 재편하고 나섰다.
범용 메모리 공급 부족 국면 지속
15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소비자용 D램 현물 가격은 최근 1년 사이 700%에 육박하는 급등세를 보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 3사가 수익성이 월등한 HBM 생산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스마트폰·PC용 D램 공급이 급격히 줄어든 결과다. 블룸버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용 HBM 시장을 석권하며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동안 노트북과 데스크톱 PC에 들어가는 표준 메모리 공급은 사실상 ‘절벽’에 내몰렸다”고 짚으며 “이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시장 침투로 이어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글로벌 PC 제조사 에이수스(ASUS) 역시 지난 11일 발표한 시장 보고서에서 “AI 서버용 메모리 수요가 생산 가용 용량을 압도적으로 흡수하면서 일반 PC용 D램 공급이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진단하며 “올해 1분기에만 일부 주력 제품의 소비자 가격이 100% 이상 급등한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나아가 에이수스는 노트북·PC용 표준 더블데이터레이트(DDR)4·5 메모리 같은 범용 메모리 공급 부족 국면이 2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주요 메모리 업체들과 3~5년 단위 장기 공급 계약 체결을 추진할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공급 구조 변화는 완제품 시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Gartner) 연구에서 노트북 제조 원가 중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16%에서 지난해 말 23%로 7%p 상승했다. 이는 다시 PC 가격 인상과 출하량 감소 전망으로 이어진다. 가트너는 올해 세계 PC 출하량이 지난해와 비교해 최소 10% 이상 줄어들 것으로 관측했다. 스마트폰 시장 역시 메모리 가격 상승 영향으로 제조 원가가 뛰고, 연내 15%가량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중국 기업들은 바로 이 틈을 노렸다. 특히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공격적인 생산 능력 확대를 바탕으로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을 13% 수준까지 끌어올리며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에 이어 세계 4위 메모리 업체로 올라섰다. 이와 함께 CXMT는 15나노 공정 기반 8,000MHz급 DDR5 제품을 양산하는 등 기술 격차 축소에도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선두 업체들의 HBM 중심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기업의 수익성을 끌어올렸지만,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업계 전반의 시각이다.

차세대 HBM 공급 경쟁 심화
HBM 시장 경쟁이 격화된 배경에는 AI 가속기 산업을 주도하는 엔비디아 중심의 공급 구조가 자리한다. 최근 시장에서는 AI 서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메모리 공급망 역시 엔비디아의 제품 로드맵과 기술 요구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 형태로 재편됐다. 특히 고성능 GPU에 필수적으로 탑재되는 HBM은 단순 부품을 넘어 AI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메모리 업체들 입장에서는 엔비디아와의 협력 여부가 차세대 AI 반도체 시장에서의 지위를 가르는 변수로 작용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앞서 엔비디아는 차세대 AI GPU ‘베라 루빈’ 시리즈의 최상위 모델 ‘NVL72’에 적용할 HBM4 공급 구조를 두고 주요 메모리 업체들과 협력을 진행했다. 애초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독점 공급 가능성을 유력하게 점쳤다. 그러나 엔비디아는 돌연 ‘안정성 중심 일반형’과 ‘최고 성능형 AI 인프라용’으로 구분해 공급사를 나누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업계는 전체 공급 물량은 일반형이 더 많을 것으로 내다보면서도 하이엔드 제품군의 가격이 이전 세대 대비 2~3배 수준에 형성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고 성능 제품군을 확보하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기술 경쟁의 핵심은 HBM을 구성하는 기본 메모리인 D램 공정에서 갈린다. 삼성전자는 HBM4 개발 과정에서 10나노 6세대(1c) D램 공정을 도입해 경쟁사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이 10나노 5세대(1b) D램을 기반으로 접근한 것과 비교하면 더 미세한 공정을 적용한 셈이다. 미세 공정이 진화할수록 칩 집적도와 전력 효율, 동작 속도는 동시에 개선된다. 삼성전자의 HBM4가 국제 표준 대비 40% 이상 높은 13Gbps 속도를 달성한 배경에도 이러한 공정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엔비디아가 공급망 관리 과정에서 협력사에 높은 기술 기준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최근 엔비디아 점검팀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방문해 HBM 생산 공정에 대한 내부 감사를 진행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엔비디아는 이번 감사에서 삼성전자의 공정 운영과 기술 세부 사항에 대해 매우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적용하며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이는 정식 계약에 앞서 협상력을 높이려는 시도로, 엔비디아는 과거에도 SK하이닉스와 TSMC 등 여타 협력사에 유사한 전략을 취한 전례가 있다는 전언이다.
공급 과잉 국면 전환 가능성
HBM 확대 전략은 향후 D램 시장 사이클 변동에 대비한 포트폴리오 조정이라는 성격도 지닌다. 그간 메모리 산업은 수요 급증 이후 설비 투자가 동시에 확대되면서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경기 순환 구조를 보여 왔다. 이에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경영진과 사업지원실 등은 현재의 메모리 호황이 최장 2년가량 이어진 뒤 시황이 반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업 전략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8년을 전후해 수요 우위 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가정 아래 투자 계획과 생산 전략을 동시에 점검 중이라는 전언이다.
차세대 메모리 투자와 생산 전략 역시 이러한 판단과 맞물려 움직인다. 삼성전자는 화성사업장에서 차세대 D램 공정 전환을 진행하는 동시에 평택 공장을 중심으로 신규 생산 라인 증설을 병행 중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이천과 청주, 용인 등 주요 생산 거점을 중심으로 메모리 생산 능력 확대에 한창이며, 신규 공장 M15X에서는 차세대 D램 생산 라인 구축이 진행 중이다. 신규 팹 구축에 통상 2년 정도가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추진되는 투자들이 실제 생산 능력으로 반영되는 시점은 2028년 전후가 될 공산이 크다.
생산 전략 변화는 국내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미국 마이크론도 대만과 싱가포르, 미국 등지에서 D램 생산 라인 확대를 추진하는 동시에 HBM 물량 확보를 위해 대규모 장비 발주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현재의 AI 수요 대응이라는 측면과 함께 향후 범용 메모리 시황 변동에 대한 방어 장치를 마련하려는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단기 호황에 편승한 투자라기보다 추후 메모리 사이클 변화에 대비해 수익 구조와 고객 기반을 미리 조정하는 과정에 가깝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