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은 앞섰고 물량은 나눴다? HBM4에서 드러난 삼성전자 ‘로스리더’ 전략
성능은 앞섰고 물량은 나눴다? HBM4에서 드러난 삼성전자 ‘로스리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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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4 최초 양산” 기술 신뢰 회복
수익 창출 영역으로 범용 D램 낙점
고단가 구간 물량 제한으로 손실 통제

엔비디아가 차세대 인공지능(AI) 가속기에 탑재할 고대역폭메모리(HBM)4의 초기 물량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배분하면서 HBM 시장의 새로운 구도가 드러났다. 삼성전자는 업계 최초로 HBM4를 양산하며 성능과 기술력을 입증했지만, 초기 물량 비중은 20% 중반 수준에 머물렀다. 생산 공정 성숙도와 수율, 공급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판단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흐름은 향후 삼성전자가 HBM4를 어떠한 역할로 활용할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HBM3E 참패 분위기 반전 성공
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HBM4 잠정 물량을 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HBM 제작에 6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만큼 공급사에 선제적으로 물량을 나눠야 올 하반기 안정적으로 HBM4를 탑재한 신형 AI 가속기 ‘베라 루빈’을 생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파악된 잠정 물량 비중은 SK하이닉스가 50% 중반, 삼성전자가 20% 중반, 마이크론이 20% 수준이다. 최근 수년간의 거래 관계와 각 사의 생산 능력, 품질 테스트 통과 가능성 등을 두루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확보한 HBM4 비중을 두고 다소 의아한 시각을 드러냈다. 삼성전자가 업계 최초로 HBM4 양산·출하에 나서며 기술 선점에 성공했음에도 점유율 자체는 아직 경쟁사 대비 낮은 수준에 머문 탓이다. 실제 삼성전자의 HBM4는 초당 11.7기가비트(Gb)의 동작 속도로 엔비디아가 요구하는 기준인 10Gb를 크게 웃돌며 가장 먼저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인 SK하이닉스가 50% 중반의 압도적인 물량을 확보하면서 단순한 성능 비교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삼성전자는 HBM4의 핵심 부품인 베이스 다이에 4나노미터(nm)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하고, 기본 재료인 코어 다이에는 10nm 6세대(1c) D램을 사용했다. 이는 경쟁사가 주로 12nm 파운드리와 10nm 5세대(1b) D램을 적용한 것과 비교해 한 세대 이상 앞선 조합이다. 그만큼 성능에서는 우위를 확보했지만, 원가 부담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첨단 공정 비중이 높아질수록 공정 난이도와 비용이 동시에 상승하는 산업 특성상 초기 단계에서 대규모 물량을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크다는 평가다.
수율과 생산 능력 역시 물량 확대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삼성전자의 HBM4용 1c D램의 수율은 최근 빠르게 개선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공정 성숙도가 높은 경쟁사의 1b D램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HBM4의 기본 재료가 되는 1c D램 생산 능력 역시 월 7만 장 안팎으로 삼성전자 전체 D램 캐파의 약 10%에 그친다. 평택4공장 증설을 통해 내년 생산 능력이 19만 장 수준으로 확대될 예정이지만, 단기간에 공급량을 대폭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다만 향후 물량 확대를 둘러싼 기대 요인도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마이크론의 공급망 이탈 가능성이 거론된다. 시장조사기관 세미애널리시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엔비디아 베라 루빈에서 마이크론의 HBM4 점유율을 0%로 하향 조정했다. 세미애널리시스는 “현재 엔비디아가 마이크론의 HBM4를 주문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짚으며 “마이크론이 데이터 전송 속도 등 엔비디아가 제시한 기준을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상황은 향후 삼성전자에 배분되는 물량이 늘어날 것이란 전망으로 이어진다.
대량 공급 가능 제품군으로 수익 극대화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삼성전자가 HBM4에서 보여준 성과는 물량 경쟁보다는 ‘기술 신뢰 회복’에 초점을 맞춘 결과로 볼 수 있다. HBM3와 HBM3E에서 경쟁력을 입증하지 못해 시장 신뢰가 흔들렸던 상황에서 HBM4 최고 성능과 최초 양산이라는 성과를 통해 분위기 반전을 이뤘다는 분석이다. 경쟁사 대비 적은 물량은 단기적인 약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성능과 기술력 측면에서 확실한 기준점을 제시하면서 삼성전자의 HBM 전략 또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동시에 삼성전자는 수익 창출이 가능한 영역으로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D램을 점찍으며 일종의 ‘이중 전략’을 취했다. 첨단 공정에서 기술 선도 이미지를 회복하는 한편, 당장 손익에 기여할 수 있는 제품군을 분명히 구분해 자원을 재배치하는 판단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서버용 DDR5 RDIMM을 중심으로 범용 D램 비중을 확대하는 생산 전략을 짰다. 이는 HBM3E에서 인증 지연과 가격 경쟁이 겹치며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을 반영한 선택으로, 고수익 제품을 통해 영업이익 변동성을 낮추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가격 지표는 이러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64기가바이트(GB) DDR5 RDIMM의 공식 가격은 지난해 3분기 265달러(약 38만원) 수준에서 4분기 450달러(약 66만원)로 급등했다. 단 한 분기 만에 약 70% 상승한 수치다. 심지어 현물 시장에서는 780달러(약 114만원)까지 거래된 사례도 보고됐다. 서버 증설과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맞물리면서 고용량 DDR5 모듈의 공급 부족이 가격 상승을 부추긴 결과다. HBM3E 시장 진입 시점이 늦어지면서 점유율 확보를 위해 평균판매단가(ASP)를 크게 낮춘 삼성전자로서는 DDR5 시장이 매력적인 시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전략 전환은 생산 공정 재편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최근 삼성전자는 기존 D램 생산 능력의 30~40%를 차지하던 1a(10나노급 4세대) 공정을 1b와 1c 노드로 순차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되는 월 8만 장 규모의 웨이퍼를 DDR5와 LPDDR5X, LPDDR6, GDDR7 등 범용 D램 생산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HBM3E에서 가동률 저하를 감수하기보다 공급 부족이 지속되는 범용 D램 시장에서 물량을 확대해 실적을 방어하겠다는 계산으로 읽힌다.

플랫폼 신뢰 높이고 시장 내 입지 강화
이와 같은 삼성전자의 이중 전략은 차세대 제품을 전면에 내세워 시장의 신뢰를 선점하되 실제 수익 회수는 다른 제품군에서 수행하는, 이른바 ‘로스리더(Loss leader)’ 전략으로 요약된다. 로스리더는 단기적인 손익이나 수익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핵심 제품을 통해 시장 신뢰와 진입 장벽을 먼저 확보한 뒤 후속 제품이나 연관 상품에서 이익을 회수하는 방식을 말한다. 통상 원가나 정상 가격보다 낮은 조건으로 제공되는 제품이 일종의 ‘미끼’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브랜드 전반의 경쟁력과 선택 우위를 강화하는 구조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가격 인하보다 기술 사양이나 공급 우선권, 세대 선점 여부 등이 로스리더의 기능을 대신하는 경우가 주를 이룬다. HBM4가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실제 수익 회수는 DDR5 등 상대적으로 공정 성숙도가 높고 대량 공급이 가능한 제품군에서 이뤄지는 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HBM4 물량을 20% 중반 수준에서 관리하는 것을 두고 “기술 우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역할을 한정하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대다수다.
이런 전략의 핵심은 HBM4 자체의 판매 성과보다는 이를 통해 확보되는 플랫폼 신뢰와 시장 내 위치다. 엔비디아와 같은 핵심 고객의 차세대 AI 가속기에 최초로 탑재되는 HBM4는 삼성전자의 메모리 기술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이 기준점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히면, 이후 세대의 HBM이나 대량 공급 계약에서 협상력과 선택 가능성은 확대될 공산이 크다. 단기 실적을 책임지는 DDR5와 중장기 기술 기준을 설정하는 HBM4가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삼성전자 포트폴리오 전반의 안정성 또한 높아질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