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파’ 연준 리더 등장에 안전자산 프리미엄 증발, 금 시장 덮친 ‘워시 쇼크’
‘매파’ 연준 리더 등장에 안전자산 프리미엄 증발, 금 시장 덮친 ‘워시 쇼크’
입력
수정
트럼프發 달러 불신이 부른 금 열풍 워시 지명설에 투기 자금 대거 탈출 ‘친트럼프 성향 상대적으로 약하다’ 평가

중국의 대규모 사재기와 미국 금리인하 기대감에 ‘천장 없는 랠리’를 이어가던 금값이 역대급 폭락을 보이고 있다. 그간 불확실한 정책을 일삼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이 급부상했지만, 금리인하에 신중한 입장인 케빈 워시(Kevin Warsh)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사가 차기 연준 리더로 등장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통화 완화 기대가 약화되고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안전자산의 투자 매력 역시 크게 낮아진 데 따른 결과다.
강세장 이어가던 금 시장 급랭
1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금 현물은 지난달 31일 전장 대비 9.5% 급락한 온스당 4,883.62달러에 거래됐다. 전날 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5,500달러선을 돌파하며 5,594.82달러로 고점을 높인 지 하루 만이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금 선물 종가도 온스당 4,745.10달러로 전장보다 11.4% 급락했다. 국제 금 가격은 지난달 26일 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5,000달러선을 넘어선 이후에도 매수세가 몰리면서 지난주 이후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왔다.
금 가격을 끌어올린 가장 큰 원인은 중국의 '금 사재기'다. 호주뉴질랜드은행(ANZ)은 중국이 약 5,500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중국 인민은행이 공식 발표한 보유량(약 2,300톤)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치로, 이 추산이 맞을 경우 중국은 독일(약 3,350톤)을 제치고 미국(약 8,100톤)에 이어 세계 2위의 금 보유국이 된다.
중국이 금 매입을 감추는 이유는 달러 의존도를 단계적으로 축소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미·중 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미국이 금융 제재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금을 비축해 달러를 우회하는 안전판을 마련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 중국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금을 중국에 보관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이 최근 캄보디아 등 개발도상국과 협력해 금을 위안화로 결제하고, 상하이금거래소 금고에 보관하도록 유도해 국제 금융시장에서 위안화 영향력 확대와 달러 견제를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금 가격은 실질 소비를 넘어선 금융 프리미엄을 축적해 왔다.
트럼프, 차기 연준 리더로 매파 인물 지명
미국의 금리인하 기대감도 금값 폭등을 부추긴 요인 중 하나다. 지난달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형사 기소 위협에 직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금값은 사상 최고치를 다시 썼다. 시장에서는 연준 수장이 사법 리스크에 노출되는 상황 자체가 통화정책의 중립성과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봤다. 이에 따라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강화되며 안전자산으로의 자금 이동이 가속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파월 의장의 기소가 연준 독립성 약화로 이어질 경우 과도한 금리인하 압박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인플레이션 기대가 다시 높아지고,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하는 동시에 달러화 자산에서 자금이 이탈하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파월 의장을 상대로 해임 가능성을 언급하며 기준금리인하 압박 수위를 높였을 당시에도 금값은 급등했고, 이후에도 연준 독립성 훼손 우려가 이어지며 금값은 구조적인 상승 흐름을 이어왔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금값의 반전은 급작스럽게 나타났다. 시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의장 인선이 직접적인 촉매로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워시 전 연준 이사를 차기 의장으로 지명했다. 지금까지는 저금리를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보다 더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 성향의 인물을 지명할 수 있다는 관측이 금값 상승을 부추겼지만, 사실상 매파(통화 긴축 선호)로 평가받는 워시 전 이사가 후보로 지명되자 금리인하 기대가 후퇴했다는 것이다.

달러 강세 전환이 금값 약세 촉발
실제 시장은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비둘기파 인물을 연준 의장으로 지명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위원 12명)를 강력하게 압박하면서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워시 전 이사 지명은 이와 다소 결이 다른 선택이다. 워시 전 이사는 ‘통화정책은 예측 가능하게 운용돼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특히 존 테일러 교수가 만든 ‘테일러 준칙(Taylor rule)’ 같은 룰(rule)을 중시하는 인물로 분류된다. 테일러 준칙은 물가가 목표치를 웃돌면 금리를 올리고,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면 금리를 내린다는 공식이다.
워시 전 이사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연준 이사를 지낸 인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연준과 금융시장 간 핵심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했다. 모건스탠리 출신으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에서도 근무하며 월가와 워싱턴을 모두 경험한 그는, 벤 버냉키 연준 의장 시절 연준 이사로 있으면서 각종 통화 완화 정책을 반대했다. 금융위기가 덮쳤던 2008년에는 추가 금리인하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2011년에는 연준의 6,000억 달러(약 874조원) 규모의 양적 완화(채권을 사들여 돈을 푸는 것)에 반대하며 사임했다.
사임 이후에도 그는 연준의 통화정책과 금융규제에 대한 비판을 이어왔다. 특히 워시 전 이사는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과 지나치게 커진 대차대조표(자산 규모)가 자산 가격 과열과 도덕적 해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워시 전 이사가 연준의장으로서 ‘질서 있는’ 금리인하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통화 긴축과 연준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워시 전 이사가 지명되자 시장의 공포를 잠재웠고, 그 결과 금과 같은 안전 자산에 몰렸던 투기 자금이 달러와 국채로 다시 이동하며 폭락이 발생한 것이다.
다만 워시 전 이사는 최근 금리인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인하에 주저하는 파월 연준 의장에 불만을 갖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한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 칼럼 등을 통해 연준이 지나치게 데이터에 의존하고, 위원들이 비슷한 모델에 매몰돼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가 나빠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논리로 읽힌다. 글로벌 금융회사 나틱시스의 크리스토퍼 하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워시 전 이사는 규제 완화나 감세 같은 정책이 전체 경제의 생산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는데, 이는 금리를 급격히 인하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