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EU 저축 역설, 넘치는 자금에도 성장 투자는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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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저축에도 혁신 투자 부족한 EU 보수적 금융 구조, 혁신 기업 자금 공급 제약 자본시장 통합 지연, 미래 성장 동력 확보 과제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EU) 은행에 예치된 가계 저축은 약 10조 유로(약 1경7,578조원)로, 전체 가계 저축의 70%를 차지한다. 유럽인들은 꾸준히 저축하고 있으며 보험사와 연기금 역시 막대한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자금은 성장 단계 기업에 필요한 지분 투자나 혁신 기업의 규모 확대를 뒷받침할 자본시장으로 원활하게 흘러가지 못한다. 이른바 '저축 역설'로 불리는 현상이다. 이 같은 구조는 냉전 시기에는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과 인공지능(AI) 경쟁, 첨단 제조업 육성, 재정 부담 확대 등으로 대규모 투자 수요가 확대되면서 금융 시스템에 대한 요구도 달라졌다. 축적된 자금을 전략 산업과 성장 기업으로 연결하는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혁신 투자 막는 보수적 금융 구조
유럽의 저축 역설은 자금 배분 방식과 관련이 깊다. 현재 유럽 금융 시스템은 예금을 통해 손실 위험을 낮추고 채권으로 부채 부담을 분산하며, 은행이 주택 구매자와 안정적인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금융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해 왔지만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기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자산과 담보가 부족한 초기 기업이나 데이터·특허·인재 등 무형 자산이 경쟁력의 핵심인 첨단 산업은 기존 금융 시스템만으로는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은행은 담보를 기반으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지만 장기간의 연구·개발(R&D)과 사업 확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높은 불확실성까지 감당하기에는 구조적 제약이 따른다.
이 같은 특성은 최근 유럽이 추진하는 전략 과제와 맞물리며 더 두드러진다. 방위력 강화와 탈탄소화, 청정산업 육성, 반도체 경쟁력 확보, AI 기술 개발 등은 모두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높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민간 위험자본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금융 구조는 가계 저축을 안전자산으로 유도하는 기능에 비해 성장 기업으로 자금을 연결하는 역할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다.

제도가 만든 안전자산 선호
유럽 금융기관의 보수적 투자 성향을 단순히 위험 회피 성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보험사는 부채 안정성을, 연기금은 가입자 자산 보호를, 감독 당국은 금융 건전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제도적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채와 우량 회사채는 규제와 감독 체계에 가장 부합하는 자산으로 평가된다. 반면 성과와 회수 시점이 불확실한 위험자본 투자는 기관투자가 입장에서 선택 부담이 큰 자산군에 속한다. 그러나 실제 유럽 투자자들이 위험자산 투자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는 미국 주식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왔다. 결국 문제는 투자 의지보다 성장 기업과 혁신 산업으로 자금이 순환할 수 있는 시장 기반의 부족에 있다.
통합 지연된 자본시장
이 같은 한계는 EU 자본시장의 구조적 특성과도 맞물려 있다. EU는 단일시장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마다 세제와 파산 제도, 상장 규정, 감독 체계가 다르다. 이러한 제도적 차이는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을 제약하고 시장 간 연계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결과 투자자들이 분석할 수 있는 기업 범위가 제한되고 시장 유동성도 분산되면서 성장 기업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 기관투자가 역시 범유럽 시장보다 자국 시장 중심의 투자 전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풍부한 자금이 존재함에도 이를 유망 기업과 전략 산업으로 연결하는 금융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다.
브렉시트 이후 이러한 문제는 더 뚜렷해졌다. 과거에는 런던이 유럽 금융시장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했지만 현재는 더블린과 파리,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암스테르담 등으로 금융 기능이 분산됐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이전이 이어지며 다수의 금융 거점이 형성됐지만 이를 하나의 시장처럼 작동하게 할 공통 규칙과 통합된 유동성 기반은 충분히 마련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유럽 금융시장은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 효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투자자와 기업, 금융기관이 집중된 시장에서는 자금 조달과 투자 회수가 활발하게 이뤄지지만 현재와 같은 분산 구조에서는 시장 효율성과 자본 배분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관련 지표도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해 기준 EU의 민간·공공 자본시장 금융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3% 수준으로 미국의 약 8%를 크게 밑돌았다. 같은 해 EU의 기업공개(IPO) 규모 역시 전년 대비 23% 감소했다.

성장 자금 순환 구조 구축 시급
결국 유럽의 과제는 금융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라는 강점을 유지하면서도 성장 기업과 혁신 산업으로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연금 제도 개편과 개인 투자시장 활성화, 성장 단계 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 자본시장 통합 등이 함께 추진돼야 한다. 유럽 경제의 경쟁력은 축적된 저축을 생산적인 투자로 연결할 수 있는 금융 시스템 구축 여부에 달려 있다. 자본시장 통합과 성장 투자 기반 확대가 이뤄질 경우, 풍부한 저축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반대로 현재와 같은 구조가 지속된다면 성장 잠재력 제약도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s Savings Paradox: Why Abundance Is Not Productive Risk Capital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