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도 가계도 빚더미인데, 트럼프는 ‘인플레이션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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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I 3년 만의 최고 상승률 기록 생활비 부담 확대, 고용시장도 활력 둔화 부채 급증 속 미국 재정 안정성 시험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파른 물가 상승을 두고 "인플레이션을 사랑한다"고 발언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이 국가부채의 실질 가치를 낮추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가계에는 구매력 하락과 생활비 상승이라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주식시장 호황과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소비 양극화와 재정 악화가 동시에 심화하는 국면에 진입한 상황이다.
물가 3년 만에 최고 찍었는데, 트럼프 “인플레 너무 좋아”
11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문답하다가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최근 3년 1개월 사이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인 데 대해 우려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수치가 훌륭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게 뭔 줄 아느냐. 나는 인플레이션을 사랑한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왜냐하면 (이란과의) 전쟁이 끝나자마자…"라고 하다가 "여러분이 모르던 걸 지금 얘기할 수 있겠다. 우리가 수백만 배럴의 석유를 가져오고 있는 걸 아는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해 대규모 원유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며칠 전 밤 불빛 없이 22척의 선박을 빼냈다. 우리가 레이더를 박살내서 그들은 레이더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빼냈고 그래서 석유가 배럴당 85달러(약 13만원)인 것"이라고 부연했다. 문답이 끝나고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을 상대로 비밀 작전을 벌여 1억 배럴 이상의 석유를 전 세계에 공급했다고 알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플레이션 관련 발언은 곧바로 논란이 됐다. 미국의 5월 CPI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4.2%를 기록하며 2023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은 상황에서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발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뉴욕포스트(NP)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이 끝난 뒤 낮아질 인플레이션을 말한 것”이라며 “발언이 맥락 없이 보도됐다”고 해명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수치는 종전 이후 크게 낮아질 것”이라며 “이미 낮은 수준이고 앞으로도 더 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에도 국민의 재정 상황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비판받았다. 그는 지난달 12일 중국 방문을 위해 워싱턴DC를 떠나기 전, 고물가에 따른 민생 부담이 이란과의 신속한 합의 타결에 동기가 되느냐는 질문에 "조금도 그렇지 않다. 나는 미국인들의 재정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란 핵보유 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나왔든 대통령이 국민의 재정 상황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 자체가 적절치 않아 논란이 됐다.

부자는 소비·서민은 버티기, ‘K자 양극화’ 심화
실제로 자본 시장과 거시지표만 놓고 보면 미국 경제는 여전히 견조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계가 체감하는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3일 발간한 경기동향보고서(베이지북)에서, 전체 12개 지역 중 10개 지역의 경제가 성장세를 이어갔다고 평하면서도, 소득 수준에 따른 소비 격차가 심각해졌다고 진단했다. 소득계층 간 양극화가 심화하는 이른바 ‘K자형 경제(K-shaped economy)’다.
고소득 가계는 가격 인상에 덜 민감했고 소비도 견조했으나, 중산층은 지출 전 돈의 가치를 따지는 경향이 강해졌고 저소득층은 생활비 압박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늘렸다. 물가 상승에 따라 구매력에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택담보대출과 소비자 대출의 연체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시장에서도 차량 가격과 연료비 부담이 커지면서 신차 수요가 둔화하고 소비자들이 중고차와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물가 상승세는 지난 4월보다 5월에 더 강해졌다.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이 운송비, 포장비, 식료품, 비료 가격으로 확산되며 가계와 기업에 부담을 줬다. 특히 기업들은 높아진 원자재 비용을 판매 가격에 온전히 반영하지 못해 마진 압박을 받았다. '고용 없는 성장'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미국 고용 시장은 채용과 해고를 최소화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관련 데이터센터 건설과 방산 수요로 제조업 고용은 증가했으나, 전체 고용 시장의 활력은 크지 않은 상태다. 기업들은 경제 불확실성을 이유로 신규 채용을 신중하게 진행하고 있다.
주식시장 호황이 일자리 창출 등 효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점에서 AI에 대한 대규모 투자 역시 K자형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M7(매그니피센트7·미국 7대 빅테크)의 주가가 오르면서 올해 주식시장은 15% 이상 상승했지만, 미국인 상위 10%가 주식시장의 약 87%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처럼 상위계층에 의해 견인되는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우려한다. 실업률이 더 증가하고 물가 상승까지 맞물리면 중·저소득층이 소비를 꾸준히 줄여 경기 침체에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美 국가부채 40조 달러 초읽기, 위기에 쓸 카드 없어
미국 가계의 소비 여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연방정부의 재정 부담도 위험 수위로 치닫고 있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39조20억7,136만 달러(약 5경9,300조원)를 기록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취임 이후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늘어난 빚만 2조8,000억 달러(약 4,260조원)에 달한다.
부채 급증의 주요 원인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 비용과 대규모 감세 정책 등이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고금리 기조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부채 총액까지 늘어나자,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는 이자 부담이 커졌다. 여기에 지난해 제정된 대규모 감세안인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은 세입 감소를 초래하며 부채 증가의 가속페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란 전쟁도 미국의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 국방부(전쟁부)는 지난 3월 18일 이란과의 전쟁에 2,000억 달러(약 300조원)가 넘는 추가예산을 백악관에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올 회계연도 국방 예산의 5분의 1이 넘는 액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 전인 지난 1월 내년도 국방 예산을 1조5,000억 달러(약 2,260조원)로 증액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관세를 부과해 빚 없는 나라로 만들겠다(Impose tariffs to make a debt-free country)”던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 실현을 위한 핵심 재원인 관세 수익에는 제동이 걸린 상태다. 지난 2월 미 대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부과 조치 대부분을 위법으로 판결하면서, 부채 상환 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비영리 단체 피터슨재단의 마이클 피터슨(Michael Peterson) 최고경영자(CEO)는 “현재 추세라면 오는 11월 중간선거 이전에 부채가 40조 달러(약 6경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재정 부담은 부채 규모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국채를 소화할 투자 기반도 흔들리고 있다. CNBC는 최근 "공짜 부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free debt)"고 지적하며 미 정부가 매년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발행하는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수요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가부채 증가 속도가 경제성장률을 웃도는 가운데 투자자들이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할 경우 연방정부의 이자 비용은 더욱 빠르게 불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역사적 경계선을 잇달아 돌파하고 있다는 사실도 심각한 경고음을 울린다. 아메리칸엔터프라이즈연구소(AEI)의 케빈 코사르(Kevin Kosar) 연구원에 따르면, 1946년 이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역사적 평균인 3.8%를 초과한 사례는 단 여덟 차례였는데, 그중 세 번이 2023년부터 2025년 사이에 집중됐다. 3년 연속 비상 임계치를 넘어선 것은 현대 미국 재정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연방재정책임위원회(CRFB) 자료를 보면, 미국이 과거 주요 경기침체에 진입할 당시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각각 35%, 80% 수준이었으나, 현재는 이 비율이 100%를 넘어선 상태다. 부가 위기 국면에서 꺼낼 수 있는 재정 카드가 사실상 소진됐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