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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트럼프 정권부터 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대(對)중국 포위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IPEF(인도태평양경제동맹), CHIP4(반도체동맹), IRA(인플레이션감축법) 등을 통해 정치적・경제적으로 중국 포위의 강도를 높여가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이 최근 미국의 IRA법과 유사한 원자재법(RMA)을 통해 사실상 중국을 의식한 정책을 발표했다.
EU, 내년 1분기 RMA법 초안 마련할 것 "자원생산 확대"
EU는 지난달 14일 RMA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으며 다음 달 25일까지 이해관계자 의견수렴을 진행해 법안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나아가 내년 1분기 중 핵심 원자재를 선정해 밸류체인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법 초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리튬과 희토류는 곧 석유와 가스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의존하면 안 된다”며 원자재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RMA법은 리튬·희토류 등 전략 핵심 원자재를 지정해서 관련된 공급망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가치 사슬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결국 공급망 위기대응 역량을 키우는 내용이 골자이다. 공급망 개발을 위한 기금도 조성해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역내(域內) 생산과 재활용, 연구 역량을 강화할 방침이다.
RMA가 겨냥하는 국가는 사실상 중국이다. 중국은 작년 12월 ‘수출통제’ 백서를 통해 "총체적인 국가안보관을 견지하면서 수출통제 체계와 능력 건설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중국이 안보와 국익 등을 이유로 희토류 등 전략물자의 수출을 통제하기 위해 법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에 더해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에 천연가스 공급 중단 등의 강수를 둬 유럽의 가스 가격이 폭등하는 등 에너지 대란이 일어났었다. 결국 EU 내에서는 배터리 원자재인 리튬, 코발트와 풍력발전용 영구자석 등에서 중국 의존도가 높아 중국의 수출 규제가 현실화 할 경우 더 큰 파장이 일 수 있다는 의견이 공유되었다. EU는 원자재 공급망 문제의 대안으로 ▲유럽 내 광물 생산 ▲폐배터리 재활용 등 순환경제 투자 ▲공급망 다변화 등을 고려하고 있으며 RMA에는 중국이 장악한 원자재 시장에서 벗어나 역내 자원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 역시 “EU는 중국에 대한 원자재 의존도 축소와 탄력적 공급망 구축을 위해 원자재법 제정을 추진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IRA와 닮은 RMA, IRA와 달리 선제 대응은 어떻게?
EU의 결정에 국내 정부는 수출전선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는 우려가 있어 예의주시하고 있다. 만일 해당 법에 IRA처럼 중국산 원자재를 사용한 제품의 EU 수출이 제한되거나 보조금이 지급되지 않는 규정 등이 만들어질 경우 국내 관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미국의 IRA로 인해 한국산 전기차가 보조금을 받을 수 없어 수출에 제동이 걸리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RMA가 국내 관련 업계에 충분히 부담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지난 1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대한상의, 무역협회, 코트라, 산업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관계 기관·단체들이 참석한 가운데 EU 원자재법 제정 동향 및 대응책 논의를 위한 민관 합동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윤창현 산업부 통상정책국장은 "RMA가 국제규범에 맞고 우리 기업에 차별적인 요소 없이 설계되도록 초기 단계부터 민관의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면서 "산업계와 긴밀히 소통하는 한편 EU와도 관련 협의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빠른 선제조치는 IRA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뒷북 외교’라고 비판받는 현 상황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유럽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의 불똥을 피하는 데만 급급할 경우 언제든 이런 상황은 되풀이될 수 있다. RMA가 우리 기업에 차별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제조업 부활이 세계 흐름인 만큼 우리나라도 이런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부장 정책 개편, 국산 제품 육성, 글로벌 공급망 변모 시도
18일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제10차 소재‧부품‧장비 경쟁력강화위원회(이하 소부장경쟁력위)를 개최해 소부장 정책 방향 변화를 논의했다. 국내 소부장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는 전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번 개편을 통해 수입의존도를 줄이고 국내 공급망 확보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아울러 주력산업 기술개발에 초점을 맞췄던 소부장 연구·개발(R&D)을 신산업 R&D 투자에 적극 확대하고 사업화 가능성에 집중할 것이며, 해외 수요기업과 국내 공급기업 간 협력을 확대해 수입보다 수출 기회를 높여 글로벌 공급망으로 발전해 나가겠다는 것을 강조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민간 주도의 협력 하의 생태계 확산 및 글로벌 공급망 위기 조기 파악 시스템 구축 등도 차질 없이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출 규제안에 대한 정부의 외교적 조치나 선제적 대응 방식은 중요하다. 하지만 소부장 정책 개편처럼 근본적인 국내 원자재 유통구조를 바꿔야 공급망 안정화를 달성할 수 있으며 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친중이 아닌 친미노선을 공교화하고 미국의 대중국 프레임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자구책은 필수적이다. 요동치는 세계의 경제 침체 속 미국·유럽과 중국의 무역 갈등 속에 새우등이 터질 것인지, 경상수지를 회복하고 대외의존도를 낮춰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지 눈여겨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