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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지난 2022년 내내 기준 금리를 가파르게 인상하면서 보유 중인 미 국채 가격의 하락, 환율 변동, 자국 내 금융 시장 압박 등을 겪은 국가들이 조금씩 탈(脫)달러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는 지난 2월 기고를 통해 개별 움직임이 관찰되는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으로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들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공통 화폐를 만들어 자체 거래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려고 계획하고 있고, 러시아는 위안화 60%, 금 40%를 최대치로 외환보유고 방침을 변경했다. 지난 3월에는 중국이 사우디와 석유 거래에 위안화를 쓰는 데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페트로 달러'가 붕괴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본위 → 석유 본위 → 달러 패권 붕괴?
국제통화 전문가인 배리 아이첸그린(Barry Eichengreen)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에서 최근의 탈달러 움직임이 디지털 결제 확산과 함께 맞물려 달러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금 거래에 있어 가장 신뢰도가 높은 달러 및 유로 등이 필수적이었으나, 디지털 결제가 확산되고 환전 수수료가 저렴해지면서 굳이 달러 결제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도전과 관계없이 달러 패권은 지속적으로 약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간 달러 패권이 어떻게 글로벌 시장에서 확산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온 아이첸그린 교수가 달러 패권 약세를 점치면서 실질적인 약세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 1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솝 이스학 연구소의 국제 콘퍼런스에서 조지 요(양룽원) 전 싱가포르 외교 및 통상산업 장관은 미국의 가파른 금리 상승 탓에 동맹국들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며 “국제 금융 시스템을 무기화하면, 이를 대체할 대안이 나올 것”이라고 강한 논조를 쏟아냈다. 그는 이어 동남아 국가들과 달러를 대체할 통화 시스템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정을 밝히기도 했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과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도 지난 1월 아르헨티나의 한 신문에 공동 기고를 통해 “우리는 거래 비용과 대외적 취약성을 줄이고, 양국의 금융, 상업 흐름에 사용되는 공동의 남미 통화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달러화 연동이 된 양국 화폐의 환율이 요동치면서 모두 피해자가 됐다는 공통된 인식 아래 통합 화폐가 남미 주요 국가들의 금융 불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금융 전문가들은 일부 국가의 불만 정도로 달러 패권이 붕괴되지는 않는다는 견지였으나 최근 들어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가 석유 결제에 달러화 대신 위안화를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조심스럽게 달러 패권의 지위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지난 1973년 사실상 금본위 포기를 선언한 스미소니언 협정 이래 달러 패권이 붕괴될 뻔한 위기를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오일 쇼크를 거치며 석유 본위로 이전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깨졌다고 본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만드는 새로운 경제권, 편입 중인 인도, 브라질
'브릭스(BRICS)'라는 용어를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가 처음 사용한 2001년에만 해도 브릭스 5개국 중 중국의 비중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IMF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의 비중은 72%로 올라섰고, 5개국의 세계 경제 시장 비중도 8.4%에서 25.5%로 성장했다. 약 17.1%의 성장 중 무려 14%가 중국의 성장에서 나온 수치다.
러-우 전쟁 시작 이후 서방 제재에 러시아 경제가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러시아는 중국에 석유 등 원자재를, 중국은 러시아에 공산품을 교환하면서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하는 중에 주요 거래 화폐를 기존의 국제 질서와 달러 위안화로 진행한 것이다.
중-러의 위안-루블화 결제액은 전쟁 전인 2021년 1월 22억 위안에서 올해 1월 2,010억 위안으로 약 90배나 늘었다. 러시아 재무부는 2022년 12월 30일 약 1,865억 달러 상당의 국부펀드(NWF)에서 위안화 비중을 기존의 두 배인 60%로, 금은 40%까지 보유할 수 있도록 개정했다. 달러와 유로, 엔 자산을 사실상 0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최근까지 중립을 지켜온 인도와 브라질도 미국 주도의 금리 상승과 그에 따른 경기 침체를 굳이 따르지 않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말 인도는 러시아와 경제 성장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 소식을 전하면서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새로운 화폐를 만드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미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교역국이 중국인 만큼 굳이 양국 간의 거래를 달러에 의존하지 않고 위안화, 혹은 브릭스에서 만든 화폐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지난 2022년 내내 유럽에 파는 에너지 대금을 루블화로 요구하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상승했던 것도 5개국이 자체 화폐를 만드는 데 뜻을 모으는 원인이 됐다. 미국이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과의 암묵적인 합의를 통해 석유 본위제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브릭스가 천연가스 등의 지하자원을 새로운 화폐의 기초 자산으로 삼으면 화폐 가치에 대한 의문도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우디와 협력, 석유 본위가 미국에서 떨어져 나가는 시나리오
이어 지난 3월 말 사우디가 OPEC+ 회담에서 석유 감산을 발표하고 위안화 결제를 허용하겠다고 밝히면서 무게 추가 크게 기울어진 모습이다. 미국이 그간 유지해왔던 석유 기반 달러화 가치 유지 전략의 핵심이었던 사우디가 위안화를 결제 화폐로 받아줄 경우 더 이상 달러 환전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미 러시아의 루블화 고수 정책이 루블화 가치 폭등에 기여하는 것을 확인한 만큼, 사우디도 굳이 달러에 의지하지 않고 양극체제의 또 하나의 축인 중국-러시아와 협력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이란이 지난 2022년 내내 인도에 석유 매각 대금으로 이란의 디나르로 결제를 진행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미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달러화의 가치가 크게 요동치자 굳이 달러에 의존하지 않고 석유에 기반한 자국 화폐를 결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금융권 전문가들은 당장은 미국 달러가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 총액의 60%에 달하는 만큼 시장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나, 중국-러시아-사우디 연합으로 신규 화폐가 만들어지면서 천연가스, 석유 및 희토류 등에 대한 결제를 신규 화폐로만 받게 될 경우 달러 패권이 양분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