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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놓고 여야가 공방을 벌였다. 야당은 "대통령 말 한마디로 추진된 졸속 삭감"이라고 비난했고, 여당은 “제대로 된 R&D를 위한 구조조정”이라고 맞섰다. 기초과학 관련 주요 학술단체 및 학생 연구원들까지 거세게 반대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나눠먹기식이라 비판받고 있는 과학기술 연구비가 사실은 정부의 PBS 제도가 만든 기형적 산물이란 지적이 나온다.
야당 “대통령 말 한마디에 과학기술계 난장판”
11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대상으로 진행한 국정감사에서는 지난 6월 윤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갈라먹기식 R&D'라고 지적한 이후 내년도 R&D 예산안이 대폭 삭감된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8월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도 국가 R&D 예산은 25조9천억원으로 올해 대비 5조2천억원(16.6%) 줄어든 수치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사업비 또한 8천8백억원으로 올해보다 25%가량 삭감됐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예산 삭감 과정의 불투명성과 청년 연구자 및 학생 피해 문제를 지적했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이 말 한마디 해서 R&D 예산, 과학기술계가 난장판이 됐다"며 "왜 아무런 근거도 없이 (R&D 예산을) 줄이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과기부가 마련한 예산안 초안을 보고할 때 대통령이나 대통령실의 심한 질책이 있었던 것 아니냐”며 "대통령이 장관에게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거친 언어로 비난했다는 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조승래 민주당 의원도 "4대 과학기술원은 1,200여 명이 잘려 나갈 위기에 처해 있다"며 "대학의 이공계 석박사 과정의 친구들이 연구 현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는 것은 추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여당 “최근 몇 년 새 예산 늘면서 낭비 요인 누적”
이에 여당은 전 정부에서 R&D 예산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효율에 대한 지적도 커졌다고 반박했다.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은 "과거부터 누적된 비효율이 R&D 예산에 포함돼 있었고, 최근 몇 년 사이 예산이 급격히 늘면서 비효율과 낭비 요인이 크게 누적됐다는 것은 모두가 얘기하고 있는 사실"이라며 "R&D 예산이 지금 제대로 성과 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방위 위원장인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도 "작년과 재작년 과기부 국감 자료를 보면 낭비성, 소모성, 선심성, 퍼주기 R&D는 잘못됐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많았다"고 김 의원의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
같은 당 박성중 의원 역시 "2008년까지 15년 걸려서 한 10조원이 늘었는데 문 정부는 4년 만에 10조원 늘었다"며 "소부장 예산 7조원을 투자했는데 하나도 효과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연구비 10억원당 저명학술지(SCI) 논문 수가 2017년에 19.45개였다"며 "그 후 예산이 10조 가까이 늘었는데도 작년에 10억원당 15.6개로 줄었다"고 역설했다.
네이처 “한국 정부 결정, 향후 STEM 분야 과학자들에 부정적 영향”
저명한 국제 학술지에서도 이번 예산 삭감 사태를 집중 조명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네이처는 "R&D 예산 삭감에 한국 과학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한국 정부가 8월 발표한 삭감안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이뤄진 과학기술개발 R&D 삭감"이라며 "한국은 1998년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도 R&D 예산은 안정적으로 유지했다"고 전했다.
네이처는 이같은 정부의 결정이 향후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의 젊은 졸업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STEM 연구가 다른 분야에 비해 안전성이나 수익성이 낮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한국 정부는 이번 예산 삭감안에 대해 '국가의 R&D 시스템을 진행돼야 할 방향으로 만드는 것'이라 설명했다”며 “성과가 저조하다고 판단되는 프로젝트를 없애고 간접 비용을 절감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미국의 과학 전문지 사이언스도 "과학 연구 예산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던 한국이 최근 연구자들과 논의 없이 예산을 삭감했다"며 과학 연구 현장에서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한 바 있다.
실제로 국내 기초과학 관련 주요 학술단체들은 R&D 예산 삭감과 제도혁신 방안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며 원점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10만 명이 넘는 기초과학 분야의 과학자들이 예산 삭감 반대에 동참하면서 반발이 더욱 확산하고 있는 추세다. 기초과학 학회협의체(기과협)는 지난달 25일 성명서를 통해 "편견과 졸속으로 마련된 정부안으로는 미래를 견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기과협은 이번 삭감이 정부 국정 목표와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에서 유지하겠다는 약속과도 부합하지 않는고 지적하며 총지출이 증가했음에도 R&D를 삭감하는 것은 재정 운영 비효율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과학기술 R&D에 이를 떠넘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과학기술계의 정부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에 타격을 줬으며, 삭감 최대 피해자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포닥)인 만큼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R&D 사업비 부정 사용 1,171건, 연구비 환수대상금액 1,787억원
그런데 앞서 여당의 주장처럼 정부는 정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예산 삭감을 결정한 걸까? 양금희 국민의힘 의원이 과기부 등 9개 정부 부처에서 제출받은 ‘연구비 환수대상 통보 및 환수 실적’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7월까지 연구비 환수 통지결정을 내린 연구과제는 총 1,690건, 이에 따른 환수대상금액은 1,786억7,8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가운데 510건의 662억1,200만원은 환수되지 않아 관련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환수가 결정된 이유는 크게 ‘R&D 규정 및 관련 법령 위반’과 ‘연구 결과 불량 및 연구 수행 포기’로 나뉜다. R&D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업비를 용도 외에 부정 사용했거나, 관련 협약을 위배하는 등 연구 부정행위가 적발돼 제재조치를 받은 연구과제는 1,171건으로 약 806억원에 대한 환수조치가 내려졌다.
실제로 일부 기업에 있어 정부 연구비는 눈먼 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 몇 년 새 빠르게 불어난 R&D 예산을 노린 자격 없는 기업이 브로커에게 구매한 연구계획서로 국가 연구비를 축내 온 사례들이 이를 방증한다. 한 중소기업의 경우 브로커에게 연구 과제의 20%를 나눠주는 조건으로 서류 작성을 맡겨 1억원을 따내는가 하면, 소규모 가구 제조 업체가 수억원짜리 기능성 화장품 R&D 과제를 수주한 사례도 있었다. R&D를 수행할 능력이 없음에도 기획 브로커를 대필작가 삼아 예산만 빼간 것이다.
또한 당정에 따르면 지난 정부 때 R&D 예산이 20조원에서 30조원으로 급증하는 과정에서 단기 현안 대응성 지원, 특정 단체 쏠림 등 R&D 예산 전반의 비효율성이 크게 증가했다. R&D 사업 수는 2019년 700여 개에서 올해 1,200여 개로 증가했고 2021년 기준으로 과제 수는 7만5,000개에 달한다. 이처럼 정부의 씀씀이는 커졌지만 2015~2019년 R&D 정책자금을 15회 이상 중복 지원받은 기업이 106개에 달하는 등 관리는 방만하게 이뤄졌다.
투입되는 예산에 비해 성과가 없는 이유
쓰는 돈에 비해 제대로 된 성과가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는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와도 관련이 깊다. PBS는 연구자나 연구기관이 경쟁을 통해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나 연구비를 충당하는 제도로, 1996년 연구 경쟁력을 키운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프로젝트별로 예산이 집행되다 보니, 각 기관이 얼마나 많은 과제를 수주하느냐에 따라 예산 확보가 달라졌다. 이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책임지기보단 자신의 연구 목적에 맞지 않는 과제라도 몇 가지 수주해 적당히 기준에 맞는 성과만 내는 문화가 형성됐다. 또한 PBS에는 과제마다 사용할 수 있는 인건비, 직접비 등의 비중이 정해져 있는데, 인건비를 거둬들이려면 과제 하나로는 충당이 어려워 한 번에 많은 과제를 수주해야 하고, 그럴수록 직접비가 남게 돼 필요하지도 않은 연구 장비를 구매하는 등 낭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내 R&D 과제 성공률이 연평균 99%라는 놀라운 기록도 PBS에서 비롯됐다. PBS의 성공 여부가 다음 과제 수주에도 영향을 미치는 탓에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과제보다는 이미 해외 연구진들이 검증을 끝낸, ‘실패 확률이 낮은’ 기술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이같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이런 경쟁 풍토가 기관간 담쌓기를 조장해 협업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나친 경쟁으로 기관보다 개인 중심의 연구 분위기가 조성됐고 기관과 기관, 연구자와 연구자 간 장벽이 생겨 연구 협력에 어려움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과학기술 연구비가 사실은 정부의 제도적 환경이 만든 기형적 산물이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연구자들이 이번 삭감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역량 하락이다. 국가 역량이 축적되지 못하면 급변하는 글로벌 과학기술 패러다임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다. 특히 최근 과학 분야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중국이 기술 우위에 서는 등 대내외적 환경 변화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는 여전히 제도적 문제에 매몰돼 있어 그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R&D 예산의 비효율은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하는 병폐다. 그러나 충분한 검토나 구조적 개혁 없이 연구자들에게 책임을 지우며 일괄 삭감으로 밀어붙이는 행위는 교각살우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