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가격 폭등은 트럼프의 보조금 재검토 탓? 진짜 병목은 애플의 ‘공급사 쥐어짜기’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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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K 지원 불확실성 속 AI 서버 메모리 쏠림 침체기 투자 축소와 애플의 공급사 압박이 키운 병목 중국산 메모리 조달 추진, 애플 향한 견제 강화 움직임

미국 정치권에서 반도체지원법(CHIPS Act) 재검토가 메모리 공급난과 전자제품 가격 상승을 촉발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보조금 집행의 예측 가능성을 훼손해 미국 내 생산시설 건설을 지연시켰다는 주장이다. 다만 현재의 공급난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요 폭증과 2023년 메모리 업계의 대규모 감산·투자 축소, 완제품 업체들의 장기간 단가 압박이 중첩된 결과다. 특히 애플은 막강한 구매력을 앞세워 공급업체의 수익성과 투자 여력을 압박해 온 데 이어, 가격 급등에 대응해 중국산 메모리를 조달 카드로 꺼내면서 공급난 책임론과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전략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섰다.
민주당 의원 “삼성·SK 지원 흔들어 가격 상승 자극”
27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로 카나(Ro Khanna) 민주당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에게 보내는 22일자 서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설립을 지원하기 위한 조 바이든 전 행정부의 보조금 지급을 트럼프 대통령이 재고하기로 한 것은 큰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약속된 지원에 행정부가 개입하면서 미국 내 생산 확대가 흔들렸고, 그 여파가 전자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카나 의원은 미 상무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해 기존에 체결된 보조금 지원 계약 가운데 지급이 지연되거나 보류될 수 있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은 모두 2022년 제정된 반도체지원법에 따라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 보조금을 승인받았다. 해당 법은 기업들이 프로젝트별 투자 목표를 달성할 경우 단계적으로 지급하는 총 490억 달러(약 71조6,900억원) 규모의 보조금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미국은 이들 기업의 투자를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 확충의 핵심 축으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보조금보다 관세를 통해 기업의 미국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며 반도체지원법을 비판해 왔다. 러트닉 장관도 일부 보조금이 지나치게 후하게 책정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기존 지원 계약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메모리 산업은 장비 발주, 클린룸 구축, 공정 안정화, 고객 인증까지 장기간이 소요되는 산업이다. 관세 압박만으로 즉각적인 증설을 끌어내기 어렵고, 보조금 약정의 신뢰가 약화할수록 미국 내 생산기지 구축에 필요한 투자 회수 전망도 흐려질 수밖에 없다.
AI가 바꾼 메모리 생산 배분
무엇보다 메모리 가격을 밀어 올린 직접 동력은 미국 빅테크의 AI 인프라 확장이다. 생성형 AI 추론 서비스가 대규모 상용화 국면으로 진입하면서 고용량 서버 D램과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확보 경쟁이 과열됐다. 데이터센터 사업자들은 장기공급계약을 통해 물량 선점에 나섰고, 메모리 업체들은 수익성이 높은 서버용 제품과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생산능력을 우선 배정했다.
HBM 증산은 같은 웨이퍼에서 생산할 수 있는 범용 D램 물량을 잠식한다. 적층 수율과 공정 단계, 패키징 난도가 높은 HBM은 동일 용량의 일반 D램보다 훨씬 많은 생산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수익성이 높은 AI용 제품에 설비를 우선 배정하면서 모바일 D램과 PC용 D램, 소비자용 낸드의 공급 순위는 뒤로 밀렸다. 마이크론이 소비자용 메모리 브랜드 ‘크루셜’ 사업을 종료하고 데이터센터 고객 지원에 역량을 집중한 결정도 이러한 생산 배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2분기 범용 D램 계약가격이 전 분기 대비 58~63%, 낸드플래시 계약가격은 70~75%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공급업체들이 HBM과 서버용 D램 중심으로 생산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면서 PC·스마트폰·소비자용 저장장치에 배정되는 물량이 빠르게 축소됐다는 분석이다. AI 수요가 첨단 가속기 수요에만 머물지 않고 메모리와 저장장치 전반의 가격 체계를 끌어올린 셈이다.
| 구분 | 핵심 내용 | 시장 영향 |
|---|---|---|
| AI 수요 확대 | 서버 D램·기업용 SSD 확보 경쟁 심화 | 메모리 가격 상승 |
| 생산능력 재편 | HBM·서버용 D램 우선 배정 | 범용 D램·낸드 공급 축소 |
| 2023년 투자 축소 | 주요 3사 감산·설비투자 축소 | 단기 증산 여력 약화 |
| 소재 공급망 위축 | 실리콘 웨이퍼 출하량·매출 감소 | 공급 회복 지연 |
대규모 감산의 후폭풍
여기에 2023년 메모리 시장이 극심한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던 점도 현재의 공급난을 키웠다. 당시 PC와 스마트폰 판매 부진, 고객사의 과잉 재고가 겹치면서 D램과 낸드 가격이 생산업체의 수익성을 훼손할 정도로 하락했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2분기에 2조8,82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고 연간 투자액을 전년 대비 최소 50% 줄이겠다는 방침을 유지했다. 삼성전자도 같은 해 4분기 더블데이터레이트(DDR)4 중심의 웨이퍼 투입 감축 폭을 약 30%까지 확대했다.
마이크론 역시 2023회계연도 매출이 전년 대비 49% 감소한 155억 달러(약 22조6,800억원)로 내려앉았다. 이에 당시 마이크론은 D램과 낸드의 웨이퍼 투입량을 2022년 고점보다 약 30% 줄였고, 시장 회복을 위해 설비투자와 공급을 동시에 억제했다. 이 과정에서 생산장비 일부를 미세공정 전환에 재배치하면서 전체 웨이퍼 생산능력도 축소됐다. 업황이 회복돼도 단기간에 과거 생산량을 복원하기 어려운 조건이 이미 이때 조성된 것이다. 소재 공급망 또한 같은 침체의 영향을 받았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세계 실리콘 웨이퍼 출하량은 2023년부터 이어진 조정 여파로 2024년에도 2.7% 감소했고, 매출은 6.5% 줄었다.
공급사 쥐어짠 애플, AI 시대 공급 공백 자초
메모리 공급망 전반이 투자를 축소한 데는 업황 침체와 함께 대형 고객사의 단가 인하 압력도 작용했다. 스마트폰과 PC 수요가 위축되자, 완제품 업체들은 대규모 구매력과 공급자 간 경쟁을 활용해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생산업체들은 물량 유지와 수익성 방어 사이에서 설비투자를 줄였고, 당시의 보수적 결정은 AI 수요가 폭발한 뒤 공급 공백으로 되돌아왔다.
마이크론은 이 누적된 긴장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 지난달 마이크론 최고사업책임자(CBO) 수밋 사다나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2023년 일부 대형 고객이 매우 공격적인 가격을 요구했고, 당시의 낮은 가격과 수익성이 업계 투자 축소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특정 고객사를 실명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시장은 오랜 기간 막강한 구매력을 행사해 온 애플로 보고 있다. 애플이 대규모 물량을 무기로 협력업체 간 무한 경쟁을 유도하고 마진을 극단적으로 깎아내려 정작 반도체 제조사들이 미래를 위한 설비투자 여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실제 글로벌 산업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있는 애플은 부품사 사이에서 ‘폭군’으로 통한다. 지난 2010년 글로벌 모바일·IT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애플은 압도적인 구매력을 무기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공급사들에 철저히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으로 대규모 선주문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후 애플의 실제 구매량이 기대치에 못 미치면서 그해 상반기 고점을 찍었던 D램 가격은 순식간에 40% 이상 폭락했다. 이로 인해 메모리 업계 전반이 심각한 수익성 악화에 직면했다. 심지어 당시 일본의 마지막 D램 제조사였던 엘피다가 결국 파산에 이르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에 공급사들의 대응도 달라졌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16건의 전략적 고객계약을 체결했으며, 통상 5년간 특정 물량 구매를 의무화하는 테이크오어페이(take-or-pay) 조건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이들 계약은 향후 회사 D램 물량의 약 20%, 낸드 물량의 3분의 1을 포괄하고, 14건의 최저 계약금액은 1,000억 달러(약 146조3,200억원), 현금 예치와 관련 금융약정은 220억 달러(약 32조1,900억원)에 이른다. 공급 보장을 원하는 고객사에 장기 구매와 자금 부담을 요구하는 새 계약 질서는 애플이 활용해 온 단기 협상 우위가 약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애플의 中 메모리 승부수, 美 공급망 전략과 정면충돌
가격 협상력이 약해진 애플이 꺼낸 대응 카드는 중국 공급사다. 애플은 비용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을 중국 판매용 기기에 적용하는 시험에 착수했고,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대통령과 러트닉 장관 등에게 중국산 메모리 사용 허용을 요청했다. 최근에는 CXMT와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의 제품을 미국 외 지역 판매 제품에 탑재하는 방안까지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CXMT는 미 국방부의 중국 군사기업 명단에 올라 있으나 상무부 수출통제 명단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YMTC는 상무부 수출통제 명단의 적용도 받고 있다.
미 의회는 곧장 초당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미중전략경쟁특별위원회의 존 물레나 위원장과 조지 화이트사이즈 의원은 지난 14일 상무부에 보낸 서한에서 CXMT를 수출통제 명단에 추가하고, 미국 기업의 CXMT·YMTC 메모리 구매를 제한하라고 촉구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이 공급 부족기를 발판으로 미국과 동맹국 시장에 진입하면 서방 메모리 업체의 투자 재원이 줄고, 향후 중국 의존도가 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CXMT도 애플이 기대하는 저가·대량 공급처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렵다. CXMT는 이미 대규모 생산체제를 갖췄고, 중국 정부 지원 아래 독자적으로 몸집을 키운 상태기 때문이다. 게다가 CXMT는 세계 D램 생산능력의 약 11%를 차지하는 4위 업체로 성장했지만 기존 생산능력의 상당 부분이 이미 시장에 투입됐고, 신규 생산라인의 수율 안정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중국 내 AI 기업과 스마트폰 업체의 수요도 빠르게 늘고 있어 애플이 추가 물량을 확보하더라도 세계 공급 부족을 해소할 규모로 연결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메모리 가격 급등의 피해자라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지만, 공급업체의 투자 여력을 압박해 온 과거의 조달 관행까지 공론화될 경우 책임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중국산 메모리를 협상 카드로 꺼낸 선택은 미국의 대중국 공급망 차단 기조와도 충돌하는 만큼, 의회와 업계의 비판은 애플의 구매 전략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