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대부 업체도 저신용자 '손절', "법정 최고금리 너무 낮아"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불법 사금융, 정작 법적 처벌은 '거의 전무' 불법 사금융도 이자율 20% 보장받는다?, 돈 벌기가 가장 쉬웠다는 사채업자들
연말을 앞두고 대부 업체와 저축은행이 신규 대출을 크게 줄이면서 신용 등급이 낮은 취약계층이 급전을 빌리기 어렵게 됐다. 업체 측은 법정 최고금리가 지나치게 낮다 보니 정상적인 대출 영업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대부 업체와 저축은행에서마저 대출을 거절당한 저신용자들은 연간 수백~수천%의 이자를 요구하는 불법 사금융에 손대기 시작했다.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불법 사금융 축출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불법 사금융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모든 노력의 결과가 퇴색되고 있단 비판이 나온다.
대출 절벽 심화, 대부 업체도 '시들시들'
최근 고금리와 물가 상승 등으로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있지만, 서민 급전 창구로 불리는 대부 업체·저축은행의 대출 절벽 현상은 오히려 더 심화하고 있다. 법정 최고 금리가 너무 낮은 탓에 영업이 어려워진 대부 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신용 대출을 대폭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둔화 속에 연체율이 급등하자 대출 심사가 깐깐해진 탓도 있다. 연말을 앞두고 월동 준비를 해야 하거나 급히 생활비·병원비 등이 필요한 서민들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릴 수 있단 우려가 쏟아진다. 대부 업체들은 연 20% 수준인 최고 금리로는 정상적인 대출 영업을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업계에 따르면 대형 대부 업체들이 저축은행이나 캐피털사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들어가는 평균 비용(금리)이 연 8~9%쯤이다. 대부 업체의 평균 연체율이 8%쯤 되고 회사 운영비로 7.5%가량 들어가는 것까지 감안하면 금리가 연 23~24% 정도는 돼야 정상적인 영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 대형 대부 업체 A사는 최근 1년째 신규 신용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월간 대출이 0건인 경우가 넉 달이나 되고, 한 달 내내 300만원 이하 소액 대출 1건만을 기록한 적도 두 번이나 있다. A사는 2~3년 전만 해도 월 평균 600억~800억원 정도 신규 대출을 했지만 지금은 대출을 늘리지 않고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A사 관계자는 “담보가 없는 개인 신용 대출은 개점휴업 상태”라며 “당분간 신용 대출을 늘릴 계획이 없다”고 했다. 중소 업체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B사의 조달 금리는 연 11~12%로 A사 대비 2~3%p가량 높다. B사 대표는 “기존 대출자들이 상환하는 금액 중 일부를 재원으로 신규 대출을 유지하고 있다”며 “저축은행이 신규 대출 채권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이라도 대출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지난 2021년부터 우수 대부 업체들이 은행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업계 현장에선 사실상 유명무실한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우수 업체인 C사 대표는 "은행들이 대부 업체에 대출해 주면 평판이 나빠진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부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영난을 핗지 못한 대부 업체들은 줄줄이 폐업하기 시작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1만6,000개에 달하던 대부 업체 수는 지난해 말 3분의 1 수준인 5,582개로 급감했다. 이런 가운데 저축은행들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과 경기 악화 등으로 건전성 관리에 비상이 걸리면서 저신용자 대출을 줄이고 있다. 5대 저축은행의 올해 2분기 부실채권 규모는 2조5,070억원으로 지난해(1조7,979억원) 대비 39.4% 늘었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고금리가 길어지면서 올해 빚을 제때 못 갚는 고객이 크게 늘었다”며 “연체율을 낮추기 위해 하반기부터 신규 대출을 절반 이상 줄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사채 내몰린 취약자들, 정작 사채업자들은 '호의호식'
서민들의 급전 대출 창구가 줄줄이 막히면서 서민들은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고 있다.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사채라도 써서 돈을 구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대부 업계에선 2019년부터 2022년 사이 줄어든 대부 업체 이용자 120만 명 중 97만 명(80%) 정도가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밀려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민금융연구원이 지난해 대부업 이용자 3,500여 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14%가 대부 업체 대출 거절 시 불법 사금융을 통해 돈을 마련하겠다고 답한 바도 있다. 금융당국은 현재 국내 불법 사금융 이용자가 총 76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들이 빌려 쓴 돈은 10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정부는 불법 사금융 축출을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직접 나서 불법 사금융 차단 의지를 강력히 피력하고 나섰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불법 사금융을 끝까지 처단하고 이들의 불법 이익을 남김없이 박탈해야 한다"며 "약자의 피를 빠는 악질적 범죄자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평생 후회하도록 강력하게 처단하고 필요하면 법 개정과 양형기준 상향도 추진하기를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현재 시행 중인 스토킹 처벌법이 있는데, 이 법을 통하면 가해자에 대한 서면 경고,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기 통신의 이용 금지까지도 조치할 수 있다"며 "사채업자에게도 스토킹 처벌법을 적용해 불법추심부터 틀어막겠다"고 강조했다. 김창기 국세청장은 "불법 사금융이 이자를 받을 때 사채업자 본인이 아니라 가족 명의 등 차명계좌를 활용하는데, 광범위하게 조사를 해 불법 수익을 추적하겠다"며 "현금을 받는 경우에도 현금을 가지고 다른 자산을 취득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시해 철저하게 과세하도록 하겠다"고 거듭 역설했다.
다만 문제는 불법 사금융 사채업자들이 법의 처벌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대부업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은 모두 천여 명인데, 이 중 구속된 사람은 단 20명에 불과하다. 불법채권추심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사람도 580여 명이지만 구속된 사람은 2명이다. 사법부에서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대부업법 위반으로 유기징역을 받은 비율은 전체의 8%에 불과하다. 특히 우리나라 이자제한법은 미등록 대부업자에게도 최고 이자율 20%을 보장해 준다. 사채업자가 불법을 저지르고 다녀도 어쨌든 이자 20%는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국회엔 '미등록 대부업자'라는 명칭을 '불법 사금융업자'로 고쳐서 미등록은 불법이란 사실을 명확히 하는 법안과 불법 사금융업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이자율을 6%까지 낮추는 법안 등이 발의돼 있으나, 해당 법안들은 모두 4년째 계류 중이다.
커져가는 불법 사금융의 '늪'
국회가 지지부진한 논의를 끝내지 못하는 동안, 불법 사금융의 늪에 빠지는 피해자는 더욱 늘어만 간다. 불법 채권추심 관련 피해상담 및 신고 건수는 올 상반기 902건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1.96배 급증한 수치다. 불법 사금융 채권추심에 시달리다 금융당국에 채무자대리인 지원 제도를 신청하는 2030 청년층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전체 채무자대리인 신청자 수에서 2030세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 57.8%에서 2021년 68.3%로 늘더니 지난해 73%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전체 채무자대리인 지원자는 1,238명으로, 전년 대비 전체 비율이 3.2% 늘어난 걸 고려하면 청년층의 증가세가 예사롭지 않다.
불법 사금융 피해 건수와 법정 최고금리 인하 간의 상관관계는 이미 입증돼 있다. 법정 최고금리는 지난 2018년에 이어 2021년 잇따라 인하된 바 있는데, 실제 감소세를 보이던 불법 사금융이 갑작스레 증가세로 전환된 게 2020년 기점이다. 이자비용 경감과 대출시장 접근성 제고를 위해 선택한 법정 최고금리 인하 정책이 오히려 취약자들을 제도권 밖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내몬 것이다. 불법 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민원을 보면, 민원 건수는 2018년 12만5,087건에서 2019년 11만 5,622건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법정 최고금리가 인하된 2020년 12만8,538건, 2021년 14만3,907건 등으로 다시 증가세를 보였다. 특히 피해 유형 중 고금리 항목을 살펴보면 2018~2019년 각각 518건, 569건으로 500대에 불과했던 피해 건수가 2020년엔 1,219건으로 2배가량, 2021년엔 2,255건으로 4배가량 늘었다. 불법 사금융 축출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뭔지 정부 차원에서 고심을 거듭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