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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수요 둔화에 美 대선 변수로 인해 불확실성 확대
저렴한 가격·편의성·안전성 갖춘 하이브리드 수요 증가
현대차, 美 신공장에서 전기차·하이브리드차 혼류 생산
글로벌 모빌리티 '퍼스트 무버(First Mover)'를 선언한 현대자동차가 전동화 전략 방향을 전기차에서 '하이브리드차 생산 확대'로 전환했다. 전기차 전용으로 짓고 있는 미국 신공장에도 하이브리드차 생산 라인을 구축하면서다. 기아도 2026년까지 하이브리드차 생산 확대를 선언했고 GM·포드·폭스바겐 등도 하이브리드 모델을 강화하기로 했다. 전기차 판매 둔화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의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조처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 하이브리드차 생산 확대 선언
30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최근 전동화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하이브리드차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전기차에 방점을 찍었던 중장기 계획에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앞서 이승조 현대차 기획재경본부장 부사장은 지난 26일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를 통해 "현대차의 강점인 유연한 생산 체계를 기반으로 하이브리드차의 판매 물량을 대폭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당초 전기차 생산 시설로 건립한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메가플랜트아메리카(HMGMA)에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위한 추가 시설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HMGMA에 하이브리드차 생산 라인을 구비하는 등 하이브리드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기존 중·대형부터 소형 모델까지 전 라인업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장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5월 기아도 전기차 수요 둔화에 대응해 오는 2026년까지 하이브리드차 제품군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장기 전략을 내놨다. 지난해 출시한 카니발 하이브리드를 포함해 올해 하이브리드차 제품군을 6종으로 늘리고 2026년 8종, 2028년 9종으로 점차 확대해 대부분의 차종에서 하이브리드 모델을 운영하겠다는 목표다. 다만 2027년부터는 전기차 판매 목표를 하이브리드차의 2배로 설정하는 등 전동화 전략의 궁극적 지향점은 전기차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해외 완성차 업체들도 전기차 전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는 2025년 말까지 북미에서 전기차 100만 대를 판매하겠다고 했지만, 지난달 이 목표를 25만 대로 하향 조정했다. 포드는 2030년까지 모든 내연기관차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설정할 계획이며, 폭스바겐그룹은 하이브리드 시스템 개발을 위해 650억 달러(약 90조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을 포함해 대다수 글로벌 업체가 하이브리드차로 선회하고 있는 만큼 100% 전동화는 늦춰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보조금 폐지·관세 인상 주장하는 '트럼프노믹스' 우려
업계에서는 현대차와 기아를 비롯해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전략 수정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저하)과 시장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조치로 보고 있다. 특히 이들이 우려하는 가장 큰 변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다. 이른바 '트럼프노믹스'의 핵심은 '반세계화·반중국·반친환경'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2기가 출범하면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를 압박하고, 전기차와 배터리에 지급하는 세제 혜택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트럼프는 지난 16일(현지 시각)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전기차는 주행거리가 짧은 데다 매우 비싸고 무거워 자동차를 100% 전기차로 전환할 수는 없다"며 "더욱이 바이든 행정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엄청난 양의 보조금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폐기할 계획이냐는 질문에는 IRA가 지원하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의 비용 문제 등을 거론하며 "IRA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심화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제 기본으로 돌아가 저렴한 가격의 에너지가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관세 인상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트럼프 캠프는 평균 3%대인 미국의 관세율을 10%까지 끌어올리는 '보편적 기본 관세'를 도입하겠다며 무역 적자 원인으로 한국·일본·유럽·멕시코·캐나다산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을 지목했다. 트럼프의 주요 타깃인 '무역 적자국' 목록에 한국이 오를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미국 대선 향방에 따른 산업별 전망 보고서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 시 IRA가 후퇴하면서 한국 배터리의 투자 위축과 실적 악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이브리드차에 수요 급증에 완성차 업체 전략 수정
최근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하이브리드차의 수요가 급증한 것도 자동차 업체의 전략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하이브리드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의 판매 증가율은 각각 33.3%와 51%에 달했다. 전기차 증가율 28%를 상회하는 수치다. 자동차 주요국의 트렌드도 비슷하다. 지난해 주요 시장의 하이브리드차 증가율을 살펴보면 미국 44.1%, 독일 42.9%, 프랑스 29.9%, 영국 25.5%, 인도 77.2%, 인도네시아 902.6%, 일본 34.1% 등으로 조사됐다.
특히 전통적인 '하이브리드 강자'이자 세계 1위 자동차 제조업체 도요타는 하이브리드차를 앞세워 2023 회계연도(2023.4~2024.3)에 사상 최대 생산과 판매를 기록했다.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로 빠르게 전환하는 동안 하이브리드 모델을 고수해 한때 변화에 대한 대응 속도가 늦다는 비판을 받았던 도요타가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기록적인 실적을 달성한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도요타와 자회사인 다이하쓰, 히노자동차의 2023 회계연도 글로벌 판매량은 1,110만 대로 집계됐다. 이 중 하이브리드차의 판매량은 350만 대로 전년 대비 31.1%나 증가했다. 도요타는 오는 2025년에는 하이브리드차 판매 대수가 500만 대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하이브리드차의 인기에 2023 회계연도 순이익도 303억 달러(약 40조원)를 달성했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올해 초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가 발표한 '2023년 자동차 신규등록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하이브리드차는 전년 대비 42.5% 증가한 39만1,000대가 판매됐다. 인기 모델 대부분에서 하이브리드차의 선택이 가능해진 데다 가격·주행거리·충전 등 전기차의 편의성과 안전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대안으로 하이브리드차의 수요가 많이 증가했다. 실제로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얼리어답터 시장에서 대중 소비시장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거치며 전년 대비 1.1% 감소했다.
100% 전동화까지는 하이브리드차 역할 필요해
자동차 시장에서 하이브리드가 다시 각광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하이브리드차는 전기차보다 저렴해 구매 장벽이 낮다. 미국 자동차 정보사이트 에드먼즈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하이브리드차 평균 가격은 4만2,000달러(약 5,700만원)로 6만 달러(약 8,200만원)인 전기차보다 저렴했다. 3만 달러(약 4,000만원) 수준의 차종도 다수 판매되고 있다. 여기에 리터당 주행거리 24km의 높은 연비를 가지고 있어 전기차에 비해 구매 부담이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
친환경성에서 전기차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도 하이브리드차의 강점이다. 전기차는 주행 시 배기가스를 배출하지 않아 무공해차로 여겨지지만, 생산부터 폐차까지의 과정을 모두 고려한 생애주기평가(LCA, Life Cycle Assessment)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조사한 결과, 준중형급에서는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의 배출량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형 SUV 급에서는 전기차가 하이브리드는 물론 일부 내연기관차 모델보다도 배출량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강조하며 내연기관차 퇴출을 선언할 때도 자동차 업계 일각에서는 전기차가 경쟁력을 갖추고 에너지믹스가 친환경화되기 전까지는 내연기관차나 하이브리드차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기차가 향후 수소차와 함께 모빌리티 분야의 탄소중립을 이끌어 갈 차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대중화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하이브리드차가 견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