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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반도체 장비 업체들, 부품 공급망서 中 배제
미국 정부의 '중국 리스크' 견제가 영향 미쳐
"매출 30%는 중국에서 나오는데" 수출 통제 타격은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제조사로 꼽히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램리서치가 공급망에서 중국 업체를 완전히 배제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중국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관련 규제를 속속 강화하는 가운데, 미국 내 주요 반도체 장비 기업들의 대(對)중국 제재 움직임 역시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AMAT·램리서치, 대중국 제재 본격화
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AMAT와 램리서치는 최근 자사 공급업체들에 ‘중국산 부품을 대체하지 않으면 공급업체 지위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회사는 네덜란드 ASML과 함께 3대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로 꼽힌다. 공급업체들은 투자자 및 주주 명단에도 중국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반도체 처리 시스템 개발사 비코 역시 공급업체에 새로운 중국산 부품 사용을 즉시 중단하고, 내년 말까지 기존 중국 공급업체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지침을 서면으로 보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AMAT는 공급업체 약 70곳 중 반도체 재료 회사 장쑤야커기술, 석영 가공 기업 장쑤퍼시픽쿼츠, 정밀기계 제조업체 쿤산킹라이하이제닉머티리얼 등에서 직접 부품·장비를 공급받는다. 2차 벤더 이하로 내려가면 공급망에 포함된 중국 기업은 수십 개가 넘는다. AMAT는 “부품의 대체 공급처를 파악해 공급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규제 강화하는 美 정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나란히 대중국 제재를 강화하고 나선 배경에는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의지가 있다. 미국은 2022년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한 뒤 점차 대중국 반도체 제재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WSJ은 “미국 관료들은 자국 기업이 부품 공급을 중국에 의존하면 중국이 위기 상황에서 미국에 대항할 카드를 손에 쥘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의 규제는 비단 중국산 부품 유입 차단을 넘어 공급망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자국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가 중국 공급업체에 기술 세부 사항과 계획을 공유하고자 할 경우 라이선스를 취득하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하고, 내년까지 현재 공급업체를 유지할 수 있는 임시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올여름에는 모회사가 중국에 있는 타국 공급 업체에도 이 같은 규정을 적용한다는 방침을 내놓기도 했다.
이에 더해 미국 정부는 지난달 말에는 첨단 반도체, 양자 컴퓨터,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 자본의 대중국 투자를 차단하는 투자 제한 규칙을 발표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첨단 기술에 대한 대중 제재를 중요시하고 있는 만큼,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분리)’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다.
일부 업체 매출 축소 전망
미 당국은 자국 반도체 장비 제조사의 대(對)중국 수출 통제도 꾸준히 강화하고 있다. AMAT는 최근까지 수출 통제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11월에는 상무부가, 지난 5월에는 메사추세츠주 지방검찰과 증권거래위원회(SEC)가 AMAT를 소환했다. AMAT가 중국 SMIC에 수백만 달러어치의 장비를 허가 없이 판매했다는 이유에서다. SMIC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업체로, 올해 1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5.7% 점유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대만 UMC를 제치고 시장 3위 기업으로 올라선 바 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2020년 12월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SMIC를 무역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렸다. 이에 따라 AMAT는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기 위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AMAT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생산한 장비를 한국에 있는 자회사를 통해 SMIC에 우회 수출, 이 같은 규제를 교묘하게 피해 갔다. 문제가 된 장비 판매 거래는 2021~2022년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정부 규제로 인해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할 경우, AMAT를 비롯한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실적에 상당한 타격이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AMAT의 3분기(5∼7월) 보고서에 따르면 AMAT의 분기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2%로 대만(17%), 한국(16%), 미국(16%)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크다. AMAT와 함께 중국산 부품 배제에 나선 램리서치 역시 3분기(7∼9월)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7%에 달했다. 이는 한국(18%), 대만(15%), 미국(12%) 등 주요 첨단 반도체 제조사들을 보유한 국가들을 훌쩍 웃도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