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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대 기업 중 내년 투자 계획 없는 기업 68% 내년 경제 성장률 전망치 1%대 후반으로 하향 한은 "美 보호무역주의 등으로 불확실성 상존"
국내 대기업 10곳 중 7곳이 내년 투자 계획을 아직 세우지 못했거나 계획이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복귀 등 경영 불확실성을 가중하는 대내외 리스크 요인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이 좀처럼 투자 확대의 동력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은행 등은 내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1% 후반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무역 갈등과 주력 품목의 경쟁 심화로 수출 증가세가 둔화하는 상황에서 내수 회복도 더디게 진행될 것이란 예상이다.
한경협, 매출 500대 기업 대상 내년 투자계획 조사
3일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따르면 지난달 13∼25일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상대로 조사를 한 결과 응답 기업 122곳 중 56.6%는 '내년도 투자계획을 아직 수립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반면 '계획을 수립했다'는 응답은 32.0%로 지난해보다 13% 포인트 감소했고 '투자계획이 없다'고 응답한 기업은 11.4%였다. 투자계획이 미정인 이유로는 조직개편·인사이동(37.7%), 대내외 리스크 영향 파악 우선(27.5%), 내년 국내외 경제전망 불투명(20.3%) 등을 꼽았다.
내년 투자계획을 수립한 기업(39곳) 중 투자 규모를 올해보다 축소한다는 응답은 28.2%로 투자 규모를 확대한 기업(12.8%)보다 많았다. 올해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답한 비율은 59.0%로 집계됐다. 지난해 조사까지만 해도 '투자 확대'(28.8%)가 '축소'(10.2%)보다 3배가량 많았는데 1년 만에 역전된 것이다. 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계획이 없는 이유로는 내년 국내외 부정적인 경제전망(33.3%), 국내 투자 환경 악화(20.0%), 내수시장 위축 전망(16.0%)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내년도 설비투자의 주된 형태에 대한 질문에는 응답 기업의 77.8%가 '기존 설비를 유지·개보수하는 수준'이라고 답했다. 이어 적극적인 설비 확장 18.9%, 구조조정 3.3% 순으로 나타났다. 기업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리스크 요인으로는 글로벌 경기 둔화(42.9%)가 가장 많았고 고환율과 물가 상승 압력(23.0%),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공급망 교란 심화(13.7%) 등이 뒤를 이었다. 국내 투자 저해 요인으로는 설비·연구개발 투자 지원 부족(37.4%),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규제(21.3%), 설비투자 신·증축 관련 규제(15.0%) 등이 꼽혔다.
마지막으로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으로는 금융 지원 확대(21.0%)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이어 세제 지원 강화(16.9%), 지배구조 및 투자 관련 규제 완화(15.3%)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과거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기업 투자가 위기 극복의 열쇠가 돼왔는데 최근에는 기업들이 투자 확대의 동력을 좀처럼 얻지 못하고 있다"며 "경영 불확실성을 크게 가중하는 상법 개정 논의를 지양하고 금융‧세제 지원 등 과감한 인센티브로 적극적인 투자를 유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내년 글로벌 통상 환경 악화 속에 수출 증가세 둔화
투자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내년 한국 경제도 더딘 회복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이날 삼일PwC 경영연구원은 '2025년 경제전망 보고서'를 통해 내년 국내 경제가 올해보다 낮은 1%대 후반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했다. 소비와 설비 투자의 완만한 회복세에도 글로벌 통상 환경 악화로 수출 증가세가 둔화할 것이란 설명이다. 보고서는 "건설 투자가 역성장을 지속하며 경기 개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약한 디레버리징(부채 감축)으로 물가와 성장에 초점을 맞춰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경제를 불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대외 환경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 △미·중 갈등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 △중국과의 기술 격차 축소 등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둔화된 수출 증가세를 보완하기 위한 내수 회복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재정·통화정책의 조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한국 경제의 성장 경로가 지지부진하겠지만 새로운 글로벌 경제 개편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 대내외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기인 만큼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글로벌 경제는 세계 인플레이션이 주요국 목표치에 근접하며 2%대 하향 안정화 추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금리 인하 기조가 더해지면서 완만한 회복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가별 성장률 편차가 확대되면서 견조한 성장을 유지하는 미국과 달리 중국·유럽연합(EU) 등은 저성장 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글로벌 공급망 차질, 임금 상승 등을 고려할 때 팬데믹 이전의 저물가 시대로 완전히 회귀하기는 어렵지만 물가가 안정된 흐름을 보일 것"이라며 "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공급망 리스크가 재발하면 인플레이션 이슈가 다시 부각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했다.
한은 "트럼프 행정부 대응 따라 경제 성장률 조정"
이에 앞서 한은은 내년 GDP 성장률을 1.9%로 전망했다. 지난 8월 발표한 성장률 전망 2.1%는 물론 잠재성장률 2%를 하회하면서 저성장에 진입하는 모습이다. 한은은 "주력 업종에서 주요국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보호무역 기조기 강화하면서 수출 증가세가 예상보다 둔화하는 상황을 반영해 성장률을 하향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한은이 제시한 성장률 전망치는 국내외 전망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2.0%를 제시한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전망보다는 각각 0.1% 포인트 낮고 올해 성장률 전망치 2.2%보다는 0.3% 포인트 낮다.
이번 전망에서 한은은 내년도 수출 증가율을 기존 2.9%에서 1.5%로 낮췄다. 올해 증가율도 6.9%에서 6.3%로 하향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한 2026년 수출 증가율은 0.7%로 제시했다. 민간소비는 회복세를 보이지만 예상보다 속도가 더디게 나타나면서 한은은 당초 1.4%로 제시했던 올해 민간소비 성장률을 1.2%로 낮췄다. 내년 민간소비 증가율은 2.0%로 종전 전망치(2.2%)보다 0.2% 포인트 내렸다. 한은은 "민간소비는 가계 소비 여력 개선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이겠지만 그 속도는 예상보다 완만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건설투자와 설비투자 전망치도 하향 조정해다. 내년 건설투자 성장률은 종전 전망치 -0.7%에서 -1.3%로, 설비투자 성장률 전망치는 4.3%에서 3.0%로 낮아졌다. 건설투자는 수주·착공 지연 영향으로 내년에도 부진한 실적을 낼 것으로 전망됐으며, 설비투자의 경우 인공지능(AI) 반도체 관련 견조한 투자수요 등으로 증가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내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도 유가 하락세·민간소비 증가세가 예상에 못 미치면서 기존 전망보다 0.2% 포인트 내린 1.9%로 제시했다. 다만 지정학적 리스크와 환율 움직임, 국내외 불확실성은 상존한다고 봤다.
이날 한은은 향후 성장률과 물가가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 강화와 이에 대한 주요국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봤다. 글로벌 무역 갈등이 격화될 경우, 교역이 급격히 위축되고 불확실성이 증대되면서 한국의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은 각각 0.2% 포인트, 0.1% 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될 경우, 국제유가는 하향 안정되고 유로지역의 안보 불안이 완화돼 경기 회복세가 탄력을 받으면서 한국의 내년 성장률은 0.2% 포인트 오르고, 물가 상승률은 0.3% 포인트 하락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