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까지 엔화 매수” 美·日 이례적 공조에도 사라지지 않는 ‘200엔 공포’
입력
수정
美 재무부, 유로 매도·엔화 매수로 日 환율 방어 공조 식품 소비세 1% 감세 추진에 연간 5조 엔 세수 공백 감세 재원·금리 정상화 없으면 엔저 압력 재부상

미국이 일본과 엔화 매수 공동개입에 나서며 엔저 방어 전선에 직접 뛰어들었다. 엔화 평가절하가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미 국채시장에도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환율 방어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의 대규모 소비세 감세와 취약한 재정 여건이 엔화 신뢰를 훼손하는 상황에서 시장 개입의 지속성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재정 불안과 국채금리 상승, 엔저발 수입물가 압력이 맞물리면서 일본이 정책 기조를 바로잡지 못할 경우 엔화 약세가 재연될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美, 엔화 약세 저지하려 대규모 매수
3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연방정부 각료회의 도중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의 메모지를 통해 미 정부가 일본 엔화 약세를 저지하기 위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메모지에는 밑줄 그은 ‘할 일(To Do)’이라는 문구 아래 “일본 엔(JPY) 매입 50억∼100억 달러(약 7조1,200억~14조2,400억원)”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문구는 보이지 않았고, 회의 탁자 위 베선트 장관의 명패가 메모지 바로 위에 놓인 모습도 함께 잡혔다.
이 사진이 나오기 전부터 개입 조짐은 감지됐다. 로이터는 지난달 30일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재무부가 여러 은행에 “엔화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고 전한 바 있다. 실제로 일본 당국도 31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약세 저지에 나섰고, 이날 엔화는 눈에 띄게 강세를 보였다.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자료를 보면, 달러는 오후 4시 14분 158.9엔 안팎에서 오후 5시 직전 157.6엔 선까지 40여 분 만에 0.8%가량 떨어졌다. 이는 같은 시간 엔화 가치가 그만큼 상승했다는 의미다.
이번 개입은 수개월에 걸친 사전 조율을 거쳐 이뤄졌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지난 1월 시장 참가자들에게 거래 조건을 문의하는 환율 조회를 실시했고, 미일 재무당국은 이후에도 환율 문제를 놓고 협의를 이어갔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은 올해 베선트 장관과 환율을 포함한 협의를 약 10차례 진행했으며, 지난 5월 베선트 장관의 일본 방문 당시에는 만찬을 포함해 3시간 30분 동안 논의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독자 개입만으로 엔화 하락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한 시점부터 미국의 참여가 구체적으로 검토된 것으로 풀이된다.
표1. 미·일 엔화 공동개입 주요 내용
| 구분 | 핵심 내용 | 포인트 |
|---|---|---|
| 베선트 메모 | ‘일본 엔화 50억~100억 달러 매입’ 문구 포착 | 미 정부의 엔화 매입 계획 공개 |
| 사전 개입 정황 | 미 재무부가 은행들에 개입 가능성 통보, 뉴욕 연은이 레이트 체크 실시 | 수개월 전부터 미일 공동개입 준비 |
| 실제 거래 | 뉴욕 연은이 유로 팔아 엔화 매입,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가 거래 수행 | 미국의 엔화 방어 개입 실행 |
| 시장 반응 | 달러·엔 환율 40여 분 만에 158.9엔에서 157.6엔으로 0.8% 하락 | 개입 직후 엔화 가치 상승 |
| 개입의 역사성 | 미일이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해 공동 매입한 것은 1998년 이후 처음 | 2011년 엔고 억제 개입과 방향 반대 |
| 추가 공조 | 미일 재무당국 모두 추가 공동개입 가능성 시사 | 엔화 투기적 매도세에 지속 대응 |
| FIMA 레포 활용 | 일본이 미 국채를 매각하지 않고 연준에서 달러 유동성 조달 | 미 국채금리 상승 충격 최소화 |
추가 공동개입도 불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상황을 아는 소식통 3명을 인용해 31일 재무부의 개입이 실제로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뉴욕 연은이 재무부를 대신해 유로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이례적 조치를 취했고, 거래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를 통해 진행됐다. 뉴욕 연은은 개입 전날인 30일에도 재무부를 대신해 은행들에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을 문의하는 이른바 ‘레이트 체크(rate check)’를 했는데, 통상 이는 실제 매입에 앞선 사전 정지 작업으로 여겨진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달 23일 40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FT는 미국과 일본이 엔화를 직접 매입해 가치를 떠받치는 방식으로 공조에 나선 것은 1998년 이후 처음이라고 짚었다. 당시 재무부는 엔화가 8년 만의 최저치로 추락하자 일본 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엔화를 사들인 바 있다. 이와 별개로 미국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쓰나미 이후에는 주요 7개국(G7) 공조 차원에서 엔화의 과도한 절상을 막기 위해 개입한 적이 있는데, 이번처럼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한 매입과는 방향이 반대였다.
양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추가 공조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다. 베선트 장관은 "미 재무부는 일본 재무성과 일본은행(BOJ)과 긴밀히 협의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추가 공동 개입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며 "외국통화당국(FIMA) 대상 레포(환매조건부채권) 기구는 중요한 안전장치"로, 향후 수개월 안에 관련 제도의 활용 규모가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가타야마 재무상도 "최근 나타난 엔화의 과도하고 무질서한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며 "미국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앞으로 추가 공동 개입에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일본은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매각하지 않고도 연준의 FIMA 레포 제도를 활용해 필요한 달러 유동성을 확보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일 무역적자 압박에 엔화 방어 동참
미국이 일본의 환율 방어에 참여한 배경에는 통상과 금융시장을 둘러싼 자국 이해가 깔려 있다. 미 재무부는 지난달 발간한 환율보고서에서 2011년 말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엔화의 달러 대비 가치와 실질실효가치가 각각 51% 하락했다고 평가하며, 현재 수준을 '상당한 저평가' 상태로 규정했다.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환율을 통해 강화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구축한 관세 장벽의 실효성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일본은 지난해 미국과의 상품·서비스 교역에서 550억 달러(약 78조3,300억원)의 흑자를 냈다. 미국의 대일 수입 가운데 자동차와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달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일본 기업은 달러 기준 수출가격을 낮추거나 관세 비용을 흡수할 여력이 커진다. 미국 기업에는 가격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는 관세를 통한 제조업 보호 효과를 훼손하는 요인이 된다.
일본 국채시장의 불안도 미 정부를 움직인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 정부가 엔화 매수 재원을 마련하려면 외환보유액에 편입된 해외 자산을 현금화해야 한다. 일본은 세계 최대 규모의 미 국채 보유국 가운데 하나인 만큼 대규모 엔화 방어가 미 국채 매도로 이어질 경우 미국의 장기금리를 밀어 올릴 수 있다. 일본 국채와 엔화의 동반 약세가 미 국채시장까지 번질 가능성이 제기되자 미국도 일본의 환율 문제를 방치하기 어려워졌다.
뉴욕 연은이 달러 매도 대신 유로 매도 방식으로 엔화를 사들인 것도 이런 부담을 고려한 조치다. 달러를 직접 매도할 경우 미국 내 인플레이션과 국채금리에 추가 변동을 일으킬 수 있고, 일본이 보유한 미 국채를 처분하면 장기금리 상승 압력이 커진다. 유로를 동원하면 엔화를 지원하면서 미국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줄일 수 있다. 동맹 지원과 자국 시장 방어가 하나의 거래 안에 결합된 구조인 셈이다.
감세 카드 꺼낸 다카이치, 재정 불안 키워
다만 이는 일본의 통화위기를 완화하는 장치일 뿐, 엔화 약세를 낳은 일본 내부의 정책 불균형을 해소하는 수단은 아니다. 현시점 엔화 신뢰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은 다카이치 정부의 확장적 재정 기조다. 고물가 타개책으로 감세를 공약한 다카이치 총리는 8%가 적용되는 식료품 소비세율을 내년 4월부터 1%로 낮춘 뒤 다시 환원하는 방안을 최근 공식화했다. 적용 기간은 2년이며 2029년 4월 세율을 8%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연간 세수 감소분은 연구기관과 외신 추산에 따라 4조4,000억~5조 엔(약 39조7,540억~45조1,750억원)에 달한다.
다카이치 총리는 적자국채에 의존하지 않고 물가 상승과 명목성장에 따른 세수 증가분으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의 재정 구조는 낙관적인 세수 전망에 의존할 여유가 크지 않다. 일본은 이미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정부부채를 안고 있다. 일본 재무성의 2026회계연도 예산안에 따르면 일반회계 규모는 122조3,092억 엔(약 1,105조원)이며, 이 가운데 국채 발행액이 29조5,840억 엔(약 267조원)으로 전체 세입의 24.2%를 차지한다. 원금 상환과 이자를 합친 국채비는 31조2,758억 엔(약 282조원)으로 전체 세출의 25.6%, 이자 지급액만 13조672억 엔(약 118조원)에 이른다.
국채시장은 일본의 재정 부담을 이미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지난달 9일 2.9%까지 올라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고, 30년물 금리는 4%를 웃돌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차환금리 상승으로 일본 정부의 이자 지출이 2025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5%에서 2031년 두 배 수준으로 늘고 2036년에는 4%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했다. 명목성장으로 확보한 세수를 감세에 우선 배분하면 늘어난 이자비용을 흡수할 재정 완충력이 약해진다. 실제 시장은 높은 국채금리를 통화가치 지지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정 위험에 대한 추가 보상으로 해석했다.
엔화 약세는 수입물가와 가계 생활비를 끌어올려 일본 경제의 기초체력을 약화시킨다. 임금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면 국민의 실질구매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와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하는 일본 경제에서 엔저는 수입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내수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킨다. 생활비 부담과 실질임금 감소는 다카이치 총리 이전 정권들의 지지율을 끌어내린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다카이치 총리가 식료품 소비세 감세를 추진하고 있지만 엔화 약세와 수입물가 상승을 막는 근본 대책으로는 부족하다.
엔화 매수만으로 막기 어려운 구조적 약세
엔화 가치를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수단은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다. 일본은 1조900억 달러(약 1,550조원)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바탕으로 시장에 개입할 충분한 여력을 갖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일본은 2024년 이후 엔·달러 환율이 160엔 안팎에 이르렀을 때 네 차례 시장에 개입해 총 1,000억 달러(약 142조원)가량을 투입하며 엔화를 사들였다. 하지만 최근 개입에서는 엔화 약세 흐름을 장기간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
가타야마 재무상은 최근 정부연금투자펀드(GPIF)를 비롯한 일본 대형 연기금에 일본 국내 자산 투자를 늘려달라고 촉구했다. 개인의 국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비과세 투자 대상에 국채를 포함하는 방안도 거론했다. 다카이치 총리도 가계와 GPIF가 일본 금융자산 투자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엔화 약세를 이끄는 요인이 일본 내부뿐 아니라 미국의 고금리와 국제유가 상승 등 외부에도 있는 만큼 정부가 성급하게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보다 미국 국채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시바타 히데키 도카이도쿄증권 전략가는 “달러당 162엔 선이 명확하게 뚫리면 손절매 물량까지 겹쳐 엔화 매도세가 더 확대될 수 있다”며 “다음 저지선은 165엔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월가에서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20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뱅가드그룹은 일본은행의 정책 변화가 일본 국채금리를 충분히 끌어올리지 못하면 엔·달러 환율이 200엔까지 오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쓰이스미토모DS자산운용도 “시장 개입으로 엔화가 일시적으로 달러당 150엔 수준까지 강세를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200엔까지 약세를 나타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