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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원장, 무기 구매 자금, 역내 집행 강조 영국, 노르웨이 등 비회원국 협력 가능성 열어둬 세계 3위 프랑스, 역내 생산하는 무기 수입 주장

유럽연합(EU)이 27개 회원국의 군사력 강화를 돕기 위해 8,000억 유로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 Plan)'을 추진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커진 유럽의 안보 위기에 대응하고, 냉전 이후 30여 년간의 군축 기조로 취약해진 군사력과 방위 산업을 재건하려는 취지다. 다만 역내 무기 구매의 범위와 방식 등을 둘러싸고 회원국 간 이견이 커 실행과정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EU 방위 장비의 80%를 역외에 의존
9일(현지 시각) EU가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유럽산 제품을 우선 구매하는 '바이 유러피안(Buy European)'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예고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총 8,000억 유로(약 1,260조원) 동원을 목표로 하는 유럽 재무장 계획에 대해 "이 자금의 80%가 해외로 간다면 유럽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4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 재무장 계획'을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제안한 바 있다.
재무장 계획은 EU 회원국이 향후 4년간 부채 한도 걱정 없이 국방비를 총 6,500억 유로(약 1,022조원) 증액할 수 있도록 EU 재정준칙 적용을 유예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재정준칙에 따라 회원국은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해야 하며 초과 시 EU 차원의 제재가 부과될 수 있지만, 국방 부문에 대해서는 이를 면해준다는 의미다. EU 공동예산을 직접 활용하는 방안도 마련됐다. 집행위는 EU 예산으로 1,500억 유로(약 230조원)의 공동조달 대출금을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EU는 방위 장비의 80%를 EU 밖에서 구매하는데 그 중 상당 부분을 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20~2024년 유럽 무기 수입에서 미국산 비중은 64%에 달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군사 장비의 80%를 역외에서 수입하는 이유는 필요한 역량이 역내에 없기 때문"이라며 "유럽의 방산 작동 기제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비회원국인 영국, 노르웨이와의 파트너십을 언급하며 "유럽산의 범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해 유럽 비회원국과 협력할 여지를 열어뒀다.

1,500억 유로 용처 두고 회원국 이견
EU가 재무장 계획을 추진하는 가운데 EU 예산을 담보로 제공되는 1,500억 유로 규모의 공동 대출금에 대해서는 그 용처를 둘러싸고 회원국 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FT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6일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해당 자금을 역내에서 생산된 무기 구매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대출 프로그램은 EU 내 방산을 육성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사업가와 사업체를 찾아낼 기회"라며 "또다시 유럽산이 아닌 규격품을 사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프랑스의 이 같은 주장에는 EU 최대의 방산 강국으로서 향후 유럽 시장에서 영국 등 경쟁국에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프랑스는 2023년 기준으로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방산 수출국에 올랐다. EU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랑스의 주장에 대해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비롯한 일부 정상들은 영국, 노르웨이, 스위스, 터키 등 역외 우방국의 무기를 사는 데에도 이 자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번 대출 프로그램은 27개 회원국의 다수결로 승인되지만, EU 최대 군사 강국으로 꼽히는 프랑스가 반대할 경우 원활한 시행이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EU는 지난해 3월에도 역내 방산업을 지원하고자 15억 유로(약 2조3,600억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는 '유럽 방산 프로그램(EDIP)'을 발족했지만, 용처를 둘러싼 이견으로 차질을 빚고 있다. 특히 프랑스가 역외 부품에 대한 지출 비율에 상한선을 두고 제3국의 지식재산권(IP) 보호를 받는 제품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행에 난항을 겪고 있다.
유럽 업체, 금융 규제로 자금조달 한계
EDIP는 경제공동체인 EU 차원의 방산 육성에 초점을 둔 최초의 정책으로 단기적으로 고갈된 무기를 보충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인 방산 육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출발했다. 이번 재무장 계획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회원국에 국방 예산의 최소 50%를 역내에서 지출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 같은 기조에 따라 EU는 2035년까지 역내 지출 비중을 6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2030년까지 역내 방산 물자 거래를 현재의 15%에서 35%로 확대하고, 신규 군사장비의 40% 이상을 공동구매로 조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EU 차원의 방산 육성 정책과 바이 유러피안 전략에도 불구하고 정작 유럽 방산업체들이 재무장 정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 탈레스, 독일 라인메탈, 스웨덴 사브 등 유럽의 주요 방산업체들은 지상·해상·공중·우주·사이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심 원자재인 중요 광물과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을 역외 공급업체에 의존하고 있어 자체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다. 더욱이 수십 년 간의 투자 부족으로 유럽의 방산 생산능력은 크게 감소한 상태다.
유럽 방산업계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과 충돌하는 산업에 대한 규제가 자금 조달을 막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ESG 규정이 적용되기 전부터 금융권과 협력해 거래 실적이 있는 대형 기업보다는 스타트업 등 신생 기술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이에 대해 패트릭 슈나이더 시코르스키 나토혁신기금(NIF) 파트너는 "방산 부흥을 위한 정치적 분위기가 아직 금융권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며 "자금 조달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이고 금융 친화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