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美, 대중국 원전 설비 수출 허가 중단 中 원전 산업 육성 계획 차질 생길까 동남아시아, 원전 시장 다크호스로 떠올라

미국이 대(對)중국 원전 설비 수출 허가를 전격 중단했다. 미국발(發) 관세 전쟁에서 시작된 미·중 무역 분쟁이 핵심 산업 공급망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로 인해 중국의 원전 육성 계획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주도하에 빠르게 성장하던 중국 원전 산업이 거대한 암초에 부딪혔다는 평가다.
대중국 수출 제재 강화하는 美
6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최근 자국 내 원전 설비 기업들에 대중국 수출 허가 중단 사실을 통보했다. 해당 조치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되는 부품과 장비에 적용되며, 웨스팅하우스와 에머슨 등 현지 주요 원전 업체들이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이번 수출 중단에 따른 사업 피해 규모는 수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시장은 올해 들어 재점화한 미·중 갈등이 관세 전쟁을 넘어 공급망 주도권을 둘러싼 전략적 경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양국은 지난달 10∼11일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무역 협의에서 관세를 단계적으로 완화하고, 중국의 비관세 조치를 해제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장기간 지속된 무역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를 둘러싸고 합의 불이행 논란이 불거지며 상황이 뒤집혔다. 미국은 중국이 핵심 광물 수출 제한을 풀지 않았다며 반발했고, 중국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면서 역으로 미국의 일부 품목 수출 통제와 유학생 비자 취소 조치 등을 문제 삼았다.
양국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제품의 중국 수출을 재검토하고 있다"며 재검토 기간 동안 기존 수출 허가를 중단하거나 추가 허가 요건을 부과하는 등 제한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2주간 미국은 원전 설비 외에도 유압유, 제트엔진 등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대중국 수출 제한을 확대했다.

中의 '원전 키우기'
미국의 수출 통제 조치는 원전 굴기에 힘을 쏟고 있는 중국에 유의미한 타격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자로를 건설 중인 국가로 꼽힌다. 원자력 발전을 탄소 감축 전략의 핵심 동력으로 점찍고, 설비 확충에 공을 들인 결과다.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20년 9월 유엔(UN)총회 연설에서 2030년에 탄소 배출 정점을 찍고 2060년에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이른바 '쌍탄'(雙炭)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중국 정부는 직접 원전 산업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중국 국무원(국가 최고 행정기관)은 장쑤, 광둥 등 5개 지역에 총 11기의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공식 승인했다. 이는 연간 승인 기준 사상 최대 규모다. 중국의 금융 간행물 지미안 뉴스(Jiemian)에 따르면, 이들 원자력발전소에 투입될 총투자금은 최소 2,200억 위안(약 41조2,500억원)에 달한다. 건설에는 약 5년이 걸릴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정부 주도하에 공격적 투자가 이어질 경우, 중국은 '원전 후발 주자'에서 벗어나 관련 시장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 핵에너지산업협회(CNEA)가 발표한 '2025 중국핵에너지발전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이 현재의 원전 건설 속도를 유지할 시 중국의 가동 원전 설비용량은 2030년 이전에 1만1,000만㎾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세계 1위 수준이다. 다만 미국의 제재로 인해 원전 공급망 혼란이 본격화할 경우, 이 같은 전망은 현실화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동남아 원전, 데이터센터 업고 '급성장' 전망
일각에서는 중국이 주춤하는 사이 동남아 국가들이 글로벌 원전 시장의 '다크호스'로 부상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최근 동남아 국가들은 신규 원전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례로 베트남의 경우, 지난 2009년 원전 2기 개발 계획을 승인하고 2030년까지 원전 총 14기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안전성 논란이 커지자 2016년 원전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 이후 베트남은 수력·화력 발전에 의존하며 심각한 전력난을 겪었다. 지난 2023년 여름에는 폭염과 가뭄으로 전력 소비가 급증한 동시에 수력 발전 가용량이 급감하며 일부 지역에서 전기가 끊겨 공장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지난해 11월 베트남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공산당 정치국은 원자력 발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베트남 산업통상부는 국가 전력 개발 계획(PDP8)상의 주요 전력원을 검토한 결과 2026년~2030년 국가 전력망의 전력 용량이 부족해질 위험이 상당하며, 이는 에너지 안보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23년 5월 승인된 PDP8은 전국 발전 가능 용량을 2023년 말 80GW에서 2030년 150GW 이상까지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이다.
향후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의 원전 산업은 현지 데이터센터들의 막대한 전력 수요를 흡수하며 급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에 줄줄이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를 단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동남아 지역 데이터센터 및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해 22억 달러(약 3조2,000억원)를 투입하겠다고 밝혔으며, 아마존 역시 112억 달러(약 16조5,000억원) 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동남아에 90억 달러(약 13조3,000억원)를 투입한 구글은 추가로 10억 달러(1조5,000억원) 규모 투자를 단행할 예정이다. 중국 바이트댄스의 영상 플랫폼 틱톡 역시 향후 5년간 태국 데이터센터에 88억 달러(약 12조9,000억원)를 투자한다. 막대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원전과 데이터센터 산업이 중국 대신 동남아에서 나란히 성장 기반을 다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