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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상무장관 "반도체법 보조금 비율 4%로 낮춰야" 삼성전자·SK하이닉스, 보조금 수억 달러 증발 위기 이재명 정부, 韓 반도체 기업 국내 투자 유도할 수 있을까

미국이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추진한 반도체지원법(CHIPS Act, 이하 반도체법)의 보조금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투자액 대비 보조금 비율을 하향 조정해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구상이다.
美, 반도체 보조금 재협상 중
1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에 제공하는 보조금을 대폭 줄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상원 세출위원회에서 반도체법 보조금과 관련해 “(투자액 대비 보조금 비율은) 4% 이하로 약정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며 “10%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발언했다. 지난 1월 인사청문회에서 “(바이든 전임 정부가 체결한) 반도체 보조금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실제 재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공식화한 것이다.
반도체법은 2022년 바이든 전 대통령이 반도체 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제정한 법안으로, 크게 직접 보조금·대출과 투자세액공제로 구성돼 있다. 이 중 미국 정부가 축소하려 하는 것은 미 상무부가 기업을 심사해 직접 현금을 지급하는 직접 보조금이다. 당초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총투자금의 10~15% 선에서 지원금을 받을 예정이었다.
러트닉 장관이 적절하다고 언급한 수치(4%)는 대만 TSMC의 사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TSMC는 650억 달러(약 88조3,090억원) 수준이었던 대미 투자 규모를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1,650억 달러(약 224조1,690억원)로 늘린 상태다. 미국 정부가 TSMC의 추가 투자금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을 시, 투자액 대비 보조금 비율은 기존 10.3%에서 4%로 낮아지게 된다.
국내 반도체 기업 '직격탄'
향후 TSMC 외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비율까지 4% 수준으로 조정될 경우, 국내 반도체업계 대표 플레이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두 회사는 지난해 12월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임기 막바지에 미국과 보조금 계약을 마친 상태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총 370억 달러(약 51조원)를 투입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며, 미 상무부로부터 보조금 47억4,500만 달러(약 6조5,000억원)를 받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 달러(약 5조3,000억원)를 투자해 인공지능(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하고, 최대 4억5,800만 달러(약 6,300억원)의 보조금을 수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러트닉 장관 발언대로 투자금 대비 보조금 지급 비율이 4%로 낮아질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받는 보조금은 각각 14억8,000만 달러(약 2조원), 1억5,480만 달러(약 2,100억원)로 대폭 쪼그라들게 된다. 대규모 대미 투자를 지속할 유인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보조금 지급 규모가 축소되면 미국에 굳이 공장을 추가로 지을 필요가 없다"며 "시장에서는 차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다른 나라에서 더 저렴하게 생산할 방법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새 정부의 반도체 지원 정책
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보조금 축소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국내 투자 확대를 유도할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반도체 산업 지원 정책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선거 유세 당시 "반도체를 누가 지배하느냐에 글로벌 경제 패권이 달려있다"며 "압도적인 초격차·초기술로 세계 1등 반도체 국가를 만들겠다"고 강조해 왔다.
이 대통령은 이를 위해 반도체 기업 대상 보조금 지급 내용을 담은 반도체특별법을 신속하게 제정하고, 국내 생산·판매 반도체에 최대 10%의 생산세액 공제를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외에도 △차세대 AI 반도체 기술 개발 및 산업 생태계 육성 △종합 반도체 생태계 허브 구축을 위한 시스템 반도체 및 첨단 패키징 지원 강화 △RE100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의 내용이 공약집에 담겼다. 새 정부의 반도체 사업 지원 정책이 본격 시행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국내 투자가 활성화될 경우, △경제 활성화 △고용 증대 △제조 협력사 생태계 성장 등 긍정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도 국내 반도체 생태계 발전을 위해 빠른 시일 내로 구체적인 지원 정책과 실효성 있는 투자 유인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 전문연구원은 "미국 보조금 축소는 이미 예견된 부분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우리만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세부 내용을 추후 보완하더라도 반도체특별법을 우선 제정해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